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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침범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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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21. 2023

침범 (3)

단편소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3.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났지만 여름방학 직전에 사설 모의고사가 기다리고 있어서인지 3학년이 있는 층 복도의 공기는 여전히 억지스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겹겹이 쌓인, 대략 150중창의 매미소리가 학교를 에워싸고 있었다. 시멘트로 된 복도의 바닥 역시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달궈진 것 같은 여름날이었다. 복도에서 창문 너머 2반 교실에 45명 학생들은 대부분 흰 반팔티나 러닝셔츠를 입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부스럭 대는 소리, 슥슥 연필이나 펜으로 무언가 쓰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책상과 의자가 살짝씩 부딪히는 쇳소리 같은 것들이 시커만 남학생들의 억눌린 에너지와 땀냄새와 뒤섞여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4교시 국어 시간이었다. 담배를 많이 피우셔서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광대가 튀어나온 국어 선생님은 중저음의 바리톤 목소리로 교과서에 실린 한국 근대 시에 관해 비평하고 계셨다. 우리 담임이기도 한 그 선생님은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따뜻하고 합리적인 분이셨다.


선산이란 별명을 가진 내 짝 L이 수업 중에 내게 점심 급식 메뉴를 물었다. 나는 알지 못한다고 속삭였다. 그는 살짝 당황했다. 니가 급식 메뉴를 모른다고? 하는 눈빛이었다. 곧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19살 성장기의 끄트머리에 서있던 남자아이들은 사바나 초원을 이동하는 수만 마리의 누처럼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 무리 중 하나로 계단을 두세 칸씩 성큼성큼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아침을 잘못 먹어서인지 탈이 났었다. 보통은 마시는 소화제 한 병이면 쉽사리 가라앉았으나 그날따라 탈이 오래갔다. 아마 간밤의 더위가 더해져 쉬이 낫지 않았으리라.


다행히도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등교 전에 구토를 해서인지 기운이 없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기지개를 켰다. 문뜩 옆을 쳐다봤을 때 복도 쪽 창문 아래 준모가 있었다. 그는 허리를 편 채 꼿꼿이 앉아 있었다. 당시 거의 모든 고등학생이 하고 있던 짧은 스포츠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얼굴은 교실 앞 게시판 쪽으로 향해 있었다.


나는 교실에 둘 만 있다는 어색함을 좀 누그러뜨리려 준모에게 말을 걸었다.


"밥 먹으러 안 가냐?"


분명 들었을 텐데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를 둘러싼 시간 만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숨도 쉬고 있지 않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매미 소리는 여전히 교실을 에워싸고 있었고 좀 더 가까이에선 교실 양쪽 기둥과 천장의 선풍기가 돌아가며 ‘틱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나 군대 내무반이나 관공서에서 자주 보이는 크고 둥근 시계의 초침이 '쩍쩍' 흘러가고 있었다. 간혹 아주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나 괴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내 말이 씹혔으나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상대가 준모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엎드렸다. 기운이 없을 땐 자는 게 최고였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이런저런 공상 끝에 막 잠이 들려던 그 순간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준모가 조용히 일어난 것이다. 자려는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소리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일어났을 리는 없다. 그저 몸에 익은 습관이 그러했다. 우리 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여드름이 조금 피어난 볼. 뿔테 안경 안으로 약간은 비스듬한 각도의 시선을 지닌 작은 눈. 항상 조금 움츠린 어깨와 허벅지에 붙은 양손. 사부작사부작 좁은 보폭의 걸음. 그는 수업 시간 대부분 정지해 있었고 쉬는 시간 소리 없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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