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나는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판타지소설과 순수문학 혹은 청소년 문학 쪽에 관심이 있다. 판타지소설은 세계관만 두 편 정도 구상해 놓았을 뿐, 쓰지는 못하고 있고, 그나마 작년에 쓰던 소설은 현재 브런치에 연재해 놓은 것까지 쓰고 딱 멈춰 더는 진도를 못 빼고 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쓴 짧은 단편 하나. 그리고 어제부터 쓰기 시작한 단편 하나. 딱 그 정도 쓰고 있다.
그럼 난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
영어교육과 학교에 관한 글 조금과 여행 글 조금, 그리고 육아와 내 개인에 관한 에세이를 조금 썼다. 에세이를 쓰면서 글 쓰는 이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느낌도 들고, 잘 읽히지도 않아 내 글쓰기에 관한 회의도 크게 들고 있다. 좀 더 자극적인 이야기, 흥미를 끌 수 있는 삶에 관한 에세이, 즉, 잘 팔릴만한 글을 쓰기에는 내 삶이 그 정도로 다이나믹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그런 글을 쓸 만큼 힘든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 쓰는 이로선 좀 안타깝다. 그렇다고 실용적인 글, 정보를 전달하는 글, 남들이 필요로 하는 글을 쓰기에도 성향상 부지런하지 않다. 굳이 억지로 그런 글을 만들기에는 내 오롯한 자존심이 큰 벽이 되고 있다.
문체도 매력이 넘치거나 머리에 쏙쏙 박히게 시원하거나, 혹은 까불까불 개성과 위트가 넘치지도 않는다. 비루한 글쓰기 경험과 얄팍한 글쓰기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정직하긴 하지만 지루하고 앙상한 문체다. 그냥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글, 눈에 띄지 않는 글일 뿐이다. 어떤 글은 주저리주저리 쓰다 결론만 뭔가 있어 보이게 끝맺어 김이 빠지기도 하고, 어떤 글은 이게 육아 글이야, 교육학 이론 글이야 구분이 안 되기도 한다. 기획력도 떨어지는지 브런치의 사진이나 인용 기능도 적절히 쓰지 못하고 소제목이라던가 하이라이트 같은 걸 통해 특정 문구, 표현을 강조하여 가독성을 높이는 일도 하지 않는다.
또, 가만히 보면 열등감이나 질투, 비판, 자기 비하 등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가 글 여기저기에 안개처럼 뿌옇게 흩뿌려져 있다. 뮤지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씨처럼 그런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예술의 모티브가 되고 아이러니한 위로를 전할 수도 있겠지만, 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아. 이 글만 봐도 그렇다. 이런 글에서 누가 제대로 위로를 받고, 따스해질 수 있을까. 누가 읽어줄까.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에세이를 쓰는 것, 즉, 나를 돌아보는 일은 그 자체로써 고양감이 있긴 하다. 살아있는 한 인간의 삶을 책이라고 한다면 죽기 전까지는 완결되지 않는 글일 것이다. 전체적인 틀은 이야기 글이지만 장르는 매 순간 변한다. 스릴러가 될 수도, 로맨스가 될 수도, 또는 설득하는 글이나 비극이 될 수도 있다. 그의 한 순간, 하루하루는 한 페이지에 비유할 수 있다. 다만, 페이지에는 정돈된 문장이 논리적으로, 혹은 일관성 있게 쓰이지 않았다. 그의 행위, 그의 생각, 의식과 무의식, 감정 같은 것들이 단어나 구, 혹은 이미지와 색깔, 촉감과 냄새 따위로 텅 빈 페이지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래서 에세이를 쓴다는 행위는 한 인간의 책 속에 떠다니는 관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말이 되는 문장들로 만들어 주섬주섬 모아놓는 작업이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수도 있고 여러 페이지에 걸쳐 한 문장, 두 문장씩 퍼져 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에세이는 여러 페이지를 가득가득 채울 만큼 그의 삶에서 가진 몰입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아내와 아이에 관해 내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느꼈던 감정과 다짐 같은 것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나의 부정적 태도라던가 어려움의 이유가 무엇인지 탐색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나 대상,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기도 한다. 또 내가 몸 담고 있는 교육, 학교라는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차곡차곡 이해해 나가고 있다.
나는 어쨌든 꾸준히 소설을 쓸 거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든, 그렇지 않든.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에세이를 쓰면서 나라는 한 인간의 삶에 관한 책도 한 권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그게 잘 팔리든, 그렇지 않든 크게 상관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