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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May 20. 2021

육아엔 핸드드립

임신 기간 동안 커피를 끊고 내가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아이를 낳은 후 커피 중에서도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하루를 내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된 후 핸드드립 커피를 사랑하게 됐다.     


아이를 낳고 신생아와 함께 뭐가 뭔지 알 수 없이 정신없게 하루가 흘러갔다. 먹이고, 갈고, 재우고, 먹이고, 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그 때에 당분간은 쓸 수 없을 줄 알았던 핸드드립 세트를 꺼냈다. 30분이 될지, 한 시간이 될지 알 수 없는 아이의 낮잠 시간에 핸드드립 커피를 내렸다.

 

물을 끓이고, 원두 두 스푼을 핸드 그라인더로 간다. 갈린 원두를 종이 필터 위에 쏟고 드리퍼를 톡톡 쳐서 수평을 맞춘다. 포트에 담은 뜨거운 물로 원두를 적셔 뜸을 들인다. 원두가 빵처럼 부풀고 가로선을 그으며 터지기까지 하면 커피를 추출할 때가 되었다. 물을 드리퍼의 안쪽부터 동그랗게 굴리면서 붓는다. 원두에서 기포가 몽글몽글 피어나고 커피물이 똑똑똑 떨어지기 시작한다.     



당시 필요했던 건 밥, 잠, 샤워, 책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늘 핸드드립 커피를 제일 먼저 선택했다. 그냥 커피가 아니라 반드시 핸드드립 커피가 필요했다. 이유는 커피의 맛보다 그 과정에 있었다. 커피를 내리 데에 집중하는 동안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초보 엄마라는 것을 잊고 ‘단지 나’로 존재했다. ‘오로지 나’일 수 있었다.      


이 시간 동안은 불안, 혼란, 불만을 잊을 수 있었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명상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마음을 비우는 명상 시간이라 생각했다. 못 씻고, 못 먹어도 핸드드립 명상만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     


아이가 18개월이 된 지금까지 매일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다. 신생아를 돌볼 때의 간절함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시간은 소중하다. 18개월이나 됐으니 이제는 육아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아이는 매일 새롭고 나는 아직도 혼란스럽고 피곤하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 있어야 마음을 정돈하고 몸을 각성시킬 수 있다.   

  

내가 원두를 사는 단골집은 최근 들어 일주일 전에 원두 주문을 미리 받아서 로스팅을 하는 것으로 운영 방식을 바꿨다. 원두가 얼마나 남았는지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일주일 또는 그 이상을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지내야 한다. 올해 아이가 자주 아파서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는데 원두가 떨어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핸드드립 커피가 없으면 안 된다. 마음을 정돈하지도 몸을 각성하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건 너무 힘들었다.     



가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하면서 아찔해 한다. 하루 종일 동요를 듣고 남은 아이 밥을 먹고 아이 책을 보는 나에게 커피가 없었다면, 체력 약하고 잠 많은 나에게 커피가 없었다면, 아이의 낮잠 시간 책을 읽는데 커피가 없었다면. 모두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아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듯이 이제는 핸드드립 커피 없는 생활도 상상할 수 없다.      


핸드드립 커피는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었다. 언젠가는 나에게 핸드드립 커피의 참맛을 알게 해 준 나의 아이와 함께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싶다. 이게 다 너의 덕분이라는 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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