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쇄 업자의 강의

홍교수의 교수법 03

by 홍길동


30년이 다 된 오래전 일이다. 당시 나는 한국생산성본부 공개 교육부서인 경영교육부 HRD팀에 있었고, 나의 업무는 조직의 교육부서 담당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기획하고, 공개 교육과정으로 개설하는 일이었다. 그런 중, 교육담당자들의 행정업무를 돕는 목적으로 하는 「교육훈련 행정 및 운영 과정」을 기획하여 신규 교육과정으로 개설하였다. 전에 없었던 교육이고, 다소 부차적인 내용이라 모집이 잘 될까 하는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20여 명이 수강 신청을 했다.


교육과정 중 하나의 모듈은 인쇄 업무에 관한 시간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교재 원고 파일을 주고받으면 돼지만, 당시에는 교재, 안내물 등 교육에 필요한 인쇄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교육담당자로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나름대로 큰일이었던 교육담당자의 인쇄물 제작 업무에 관한 요구를 반영하여 주제를 선정하였지만, 누구에게 강의를 맡기느냐가 문제였다. 마침 한국생산성본부에 들어오는 인쇄 업자 중에서 조용하고 진지해 보이는 분에게 강의를 요청했다. 그분은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강의 의뢰에 당황했지만, 다행히 바로 동의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교육과정 개강일이 되고, 인쇄 업무 관련 교육 모듈이 시작됐다. 강사를 소개하고 교육과정 기획자로서 어떻게 강의가 전개될지 자못 궁금한 마음으로 강의실 뒤편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인쇄 업자는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나서는 분필을 들어 칠판 왼쪽 끝 맨 윗부분에 ‘인쇄의 역사’라고 적고 관련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 때, 나는 “잠시만요.”라고 하며, 마치 투수를 교체하는 야구팀 감독처럼 강단까지 나가 강의를 멈추고, 질의응답 시간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후 교육생들이 평소 궁금했던 인쇄물 제작에 관한 질문이 쏟아냈고, 인쇄 업자 분이 답하며 한 시간 수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분은 본인이 중고교 시절 분필을 잡고 칠판을 가득 메웠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수업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야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배우는 것을 당연시했고, 학습자 중심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을 때였다. 어느덧 고객으로서의 학습자를 만족시켜야 하는 고객 만족 시대가 됐고, 이제 교육하는 사람은 학습자의 요구를 철저히 분석하여, 교육 내용에 반영하기 위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물론 아직도 잘 가르치면, 잘 배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교육을 하는 사람도 제법 있어 보인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쇄 프로세스 완전히 달라졌는데, 그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스쳐 가는 궁금함에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어쩌면 그 일을 계기로 접었던 공부를 시작하고, 학위를 받고, 기술대학의 교수가 되어 대학 강단에서 인쇄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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