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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2. 2023

헤어질 결심(쌤1호와 쌤2호야 안녕)

쌤3호야 너도 안심하기는 일러


쌤1호와 쌤2호는 내가 처음으로 돈 주고 산 여행 가방이다. 십 년 이상 쓸 물건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가장 좋은 걸로 사야 한다는 지론이 있는지라, 큰 맘 먹고 쌤*나이트 대리점에 가서 샀었다.


26인치 쌤1호는 크기가 커서 생각보다 자주 손이 가지는 않았다. 두 주 이상 긴 여행을 떠날 때나 사용해서 겉보기에는 크게 낡지 않았지만, 세월은 무시할 수 없어서 바퀴는 닳았고 손잡이는 삐걱거렸다. 그러다가 빈에서 불*소스 대참사를 겪고 심각한 내부 손상을 입고 말았다.


22인치 쌤2호는 자주 사용했다. 여름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비행기 경유 공항에서 주인을 놓치고 몇몇 공항을 전전하다가 마지막 숙소에서 상봉한 스토리도 있다. 사건사고를 많이 겪은 쌤2호는 뒷면의 코팅이 거의 다 벗겨졌고, 바퀴는 제멋대로 굴러가고, 손잡이도 뻑뻑해서 가끔은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쌤1호와 쌤2호보다 사 년 늦게 산 쌤3호는 아직 쓸만하다고 나는 늘 우겼다.)


빈에 오자마자 여행 가방 쌤4호와 쌤5호, 등산 가방 아크1호와 아크2호까지 샀으니, 여름은 틈이 날 때마다 쌤1호와 쌤2호를 버리자고 했다. 봄도 은근히 여름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빈에서 숙소를 옮기던 날,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쌤2호를 빈 중앙역에 놓고 왔다.(호텔 로비 직원에게 부서진 여행 가방을 어떻게 버려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호텔방에 버리지는 말고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려도 된다고 완곡하게 알려주었다.) 내가 쓰레기통 옆에 쌤2호를 내려놓았을 때, 옆에 있던 노숙자가 나와 가방을 유심히 살피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지금도 쌤2호가 그와 함께 남은 여생을 빈에서 보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쌤2호 안녕


쌤1호와는 슈타이어에서 헤어졌다. 슈타이어역에서 숙소까지 오르막길을 이십 분 동안 걸으면서 결심이 섰다. 유럽의 구시가지 울퉁불퉁한 돌길에서 20킬로그램이 넘는 여행 가방을 끌어본 사람은 누구나 내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그날 밤 나는 양쪽 팔에 파스를 붙이고 잤다).


서울에서 여행 가방을 버리려면 대형폐기물처리업체에 연락을 해서 오천원 정도 비용을 내고 처리 번호를 받아서 번호를 가방에 붙여 정해진 장소에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막 쓰레기 분리배출을 실시한 듯 한 오스트리아의 쓰레기 정책은 좀 더 유연하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슈타이어에서 손쉽게 쌤1호를 보냈다.


슈타이어 해*스 홈 호텔은 투숙객이 직접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쓰레기 처리 공간이 있었다. 혹시 청소 직원이 테러를 의심할까 봐 이 가방은 부서져서 버리는 것이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써서 붙였다(엄마는 구*이 번역해 준 대로 독일어를 쓸 줄도 안다!). 빈 중앙역의 노숙자처럼 혹시나 이 가방을 쓰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불*소스가 묻었던 가방속도 세제로 꼼꼼하게 닦아서 내놓았다.


쌤1호 안녕


그렇게 우리는 쌤1호, 쌤2호와 헤어졌다.



그런데 쌤3호도 문제가 생겼다. 전부터 가끔 손잡이가 말썽을 부리곤 했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지내던 어느 날부터 밖으로 나온 손잡이가 들어가지 않았다. 부다페스트 숙소에서 공항으로 가던 날, 때리고 달래서 억지로 손잡이를 밀어 넣어 한국에 왔는데 그때 들어간 손잡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긴장해라 쌤3호


쌤*나이트 대리점에 수리를 맡겼더니, 외국에서 구입한 가방이라 같은 색 손잡이가 없을 수도 있으며 유상 수리라서 비용도 제법 나올 거라고 했다. 가방이 공장에 들어가면 수리 담당자가 전화를 한단다. 비용이 부담되거나 손잡이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수리를 거부한다면 그쪽에서 대신 버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니 쌤3호야, 너도 긴장하렴.


사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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