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스함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던 친구 같던 바람이 오늘은 엄마의 회초리처럼 매섭게 분다. 엊그제 엄마가 이제 네가 쓰라고 주던 두꺼운 목도리가 간절히 생각난다. 내가 이제 이 몸으로 어딜 다닐 수 있겠냐며 챙겨주던 엄마의 냄새가 밴 하얀 목도리. 그 목도리는 사실 옛날 양털 목도리가 유행하던 시절 내가 사다 준 목도리다. 엄마는 한두 번 쓰고 서랍장에 고이 접어 두었었다. 얇은 목도리를 하고 춥다고 아우성을 치니 엄마는 절룩거리며 여기저기 살펴보다 그 목도리를 찾아 내 목에 둘러주었다.
내 머릿속에 늘 있는 울 엄마. 나의 생활습관이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때 울 엄마는 정말 알뜰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산다.
빨랫비누 조각을 스타킹에 모아 매어 쓰던 것, 거의 다 쓴 치약을 반으로 뚝 잘라 싹싹 긁어가며 쓰던 것, 콩나물 대가리, 파껍데기, 양파껍질 하나도 버리지 않고 육수낼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 작은 동전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아끼고 아끼며 살았던 울 엄마, 무심코 봐왔던 엄마의 습관을 난 그대로 하고 있다. 나도 커서 저렇게 해야지, 그런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었는데 무의식 속에 엄마의 행동이 그대로 흡수되었나 보다. 난 그렇게, 그런 행동을 무심코 따라 하고 있다.
치약을 잘라 쓰던 내 모습을 보고 시엄니는 함박미소를 지었었다. 그래도 며느리가 씀씀이가 헤프지는 않구나 싶은 미소.
엄마처럼 궁상떨며 살기 싫어서 한동안 사고 싶은 것들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고 살았던 적이 있다. 옷장에 나란히 걸려있는 입지 않는 옷들, 서랍에 고이 모셔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난 잘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혼자 피식 헛웃음을 지었었다. 그러게 엄마는 왜 이런 것까지 나한테 고스란히 물려주었는지.
눈이 녹지 않아 걷기가 불편한 동네를 천천히 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걸어도 편안한 이런 관계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딸이 시집가서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인간관계가 좁아진 내 일상에 친구 같은 딸이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다 큰 딸을 하루빨리 독립시켜야 하는데 아직도 내 품에서 지지배배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살고 있고 내 잔소리에는 전혀 타격감이 없으니 나중에 어찌 시집을 보낼꼬. 내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할 딸내미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 속에 아스라이 그려진다.
이렇게 눈이 쌓인 거리를 울 엄마랑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성인이 되어 엄마랑 손잡고 산책한 적이 있었던가? 어릴 때의 엄마만 생각나고 다 커서의 엄마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난 그렇게 밖으로만 돌며 살았던 무심한 딸이었다. 엄마의 외로움, 엄마가 마음에 품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엄마도 나름 소망이 있었을 텐데 아등바등 아빠랑 장사하고 싸우고 살림하면서 살아가는 엄마의 마음속은 어땠을까?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딸은 나를, 엄마를 어떻게 생각할까?
엄마가 내포한 것을 숨기고 자식들에게 보여준 그 모습들은 내 눈에 존경심이 우러나올 때도 있고 거부감이 일 때도 있다. 엄마이기 때문에 좋았고 엄마이기 때문에 싫었던 것들이 지금은 엄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깝다. 내가 결혼하고 느꼈던 것들을 엄마도 분명 느꼈을 텐데 난 여전히 철부지 아이처럼 엄마에게 기대고 싶고 엄마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만 같다.
따스한 엄마, 이기적인 엄마, 무서운 엄마, 아픈 엄마, 늙어가는 엄마, 아주 오래전 회초리 들며 무섭게 굴었던 엄마에게서 느꼈던 애증의 감정은 털끝만큼도 남아있지 않고 이제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엄마가 그립고 그립기만 하다.
내가 지금 딸에게 남기고 싶은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주 작은 이슬만큼의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는 엄마이다. 매 순간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짓는 딸보다 힘들 때 엄마의 모습을 보고 배웠던 데로 잘 이겨내고 헤쳐나가는 강인한 딸이 되기를 바란다.
아마 울 엄마도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뜻대로 되지 못했으니 엄마의 삶이 후회로 남지 않도록, 생의 아쉬움을 모두 탈탈 털고 이승을 떠날 수 있도록,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엄마에게 별 볼 일 없는 자식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한다는 말이 전부이지만 온전히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자주, 꼭 껴안고 내 진심을 전하고 있다.
인간은 마음 깊은 곳에 따스함이 있다. 그 따스함을 끌어내려면 나를 사랑 안에 두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자신이 무척 이기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인간의 성선설을 믿는다. 그 따스함을 잃지 않기 위해 종교를 떠나 자애롭고 사랑 가득한 미소의 마리아상을 늘 마음에 품고 있다. 내가 화가 날 때, 잡념이 가득하여 열감이 온몸에 퍼질 때 깊은 곳에 숨겨놓은 마리아상을 떠올린다. 하얀 면사포를 두르고 양팔 가득 나를 아기처럼 꼭 안아줄 것 같은 그런 포근함을 상상한다. 살면서 엄마가 나에게 한 행동들을 문득 하나둘씩 떠올릴 때마다 회초리로 나를 훈육할 때의 무서웠던 엄마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미움이 가득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내가 살면서 따스함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심장 안쪽 깊은 곳에 따스함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그 따스함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따스함을 베풀 때 마음이 편해지듯이 그 따스함은 분명히 엄마의 유전자이다.
엄마도 몰랐을 사랑을 내가 깨달았듯이 딸도 사랑이라는 묘약을 잘 꺼내쓸 수 있도록 잔잔하고 깊게 물려줘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