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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오마주 Mar 15. 2024

아빠표 숭어 매운탕

가족이야기 2. 친정 아빠

 가끔 아버지의 사랑을 잊는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팔과 다리에 동생과 매달려 아빠가 다리를 움직이면 까르르 웃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가 무거워지고, 아빠의 다리는 약해지고, 우리의 시간이 쌓이는 만큼 시절은 잊힌다.

 사회 초년생이 된 해, 아버지 연배의 상사를 모실 때는 아버지가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결혼을 하고는 완전한 어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까, 어느 순간 호칭부터 아빠에서 아버지로 바뀌었다. 육아에 치이는 동안 아버지를 떠올릴 때는 무언가 부탁할 순간이었다. 10분 남짓 통화를 끝내면 또 잊고 지내게 된다.



결혼한 지 석 달도 안 되어 아이가 생겼다.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사진을 보며 뾰족하게 나온 부분에 마우스를 갖다 대시며 아직 성별을 모른다고 하셨다. 함께 초음파를 본 남편은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벅차서 어쩔 줄 몰랐고, 시댁에서는 ‘둘째는 딸 낳으면 된다.’라고 아쉬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일 기뻐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는 크게 한숨을 쉬셨다. “벌써 임신? 우리 딸 힘들어서 어째?” 그 한마디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빠라고 부르던 그때가 스쳤다. 나는 여전히 아빠의 귀하고 어린 딸이었다.


아이가 뱃속에 자리를 건강하게 잡았던 여름, 부단히도 놀러 다녔다. 낚시 좋아하는 남편, 낚시를 사랑하는 아버지. 가족 여행의 목적은 대체로 낚시가 되었다. 아버지와 남편은 방파제에서 어부처럼 숭어를 낚았다. 노동과도 같은 거친 스포츠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물고기를 잡을 때면 행복한 표정으로 팔을 걷고 모자를 벗고 수확하기에 여념 없었다. 남자들의 빨개진 피부들을 보며 ‘밤에 따가울 텐데.’라며 혀끝을 찼다.

 낚시하는 모습을 가끔 응시하며 걷고 수다 떨고, 엄마와 나는 하염없으면서도 늘어지는 시간들을 설핏 즐기고 있었다. 더위를 피해 근처 카페에 앉아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의 소리를 들으며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콘도에는 대청마루 같은 바비큐장이 있었다. 회를 못 먹는 슬픈 임산부는 식감이 쫄깃한 숭어회를 눈으로 먹었다. 결국 아버지가 칼칼하게 매운탕을 끓여 주셨다. 집에서 준비해온 무, 양파, 파를 큼직하게 썰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손질한 숭어를 통째로 얹었다. 건 새우가루와 고춧가루, 된장을 넣어 간을 했다. 소금 한 숟갈을 더 넣을까 하다가 배를 어루만졌다.


 뚜껑을 덮고 있어도 그 향기는 바닷바람에 휩싸여 온 동네를 휘저었다. 뚜껑을 열면 대차게 북적거리며 뽀얀 생선 살이 보였다. 숟가락으로 한 점을 떠 호호 불었다. 희미하게 어두운 밤하늘에 달빛과 가로등, 지평선까지 먼바다 풍경을 봤었다. 숟가락으로 한입 꿀꺽, 그 맛을 어떻게 잊을까.


 회사 콘도에서 직원 가족으로 보내는 마지막 여름밤은 불이 없어도 캠프파이어와 같은 경건함이 있었다. 과장으로 퇴직하시는 아버지가 현장의 반장일 때부터 줄기차게 왔던 곳이었다. 아기 때도 왔었고, 유년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 다니면서 동기들과도 왔었다. 이곳에 아버지의 모든 시절, 서른다섯 해의 여름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저기에서 보트도 탔었는데, 물이 많이 깊어졌어. 해파리도 바닷가까지 왔네.”


“파도가 얕아서 애들 놀기 좋았는데. 준이가 아주 아기일 때, 윤이 너 세 살쯤, 둘이 왔었어. 왔다 갔다 하는 파도가 신기한지 작은 발로 파도를 쫓아갔다가 도망쳤다가, 까르르까르르, 참 많이 웃었지.”


아버지의 미소에서 우리의 모습이 파노라마사진처럼 스쳤다. 딸 바보 아빠와 그의 딸이 찍힌 바닷가 사진이었다. ‘웃는 아이를 보며 웃고 있었겠구나.’라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그릇째 국물을 들이켰다. 따뜻한 국물이 목부터 뱃속까지 쑥 내려가고 있었다.


그 사랑이 영원불멸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출산과 동시에 너무나 쉽게 우리 아들에게 홀연히 닿았다. ‘외할배가 아빠였음 좋겠어. 아니 엄마였음 좋겠어. 외할배가 제일 좋아.’ 아들의 거침없는 애정표현에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꼭 안아줬다. 코 끝을 비비고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할배 가진 거, 우리 장관이 다 줄게.’ 아버지의 손주, 나의 아들이 주는 또 다른 행복에 함께 웃었다.


관계라는 저울이 있다면, 늘 받는 쪽에서 줘야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약한 가족을 돌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돈이라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순리다. 그래서 여태껏 가슴이 발광하는 쪽은 언제나 약하고 어린 자식이 먼저였다. ‘자식이 생기면 부모를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외로운가 알겠다.


내리사랑이 놓지 못하는 짝사랑이었다. 지금은 받은 사랑을 모르고 살았던 철없던 시간들을 후회한다. 삼국지에서 ‘장비’를 떠올릴 만큼 건장한 아버지셨다. 간이 안 좋아서, 쓸개에 돌이 가득 차서, 수술 뒤에 병실에 누워 있는 야윈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퇴직 후 5년도 채 안 돼서 생긴 일이었다. 왜 늘 젊고 건강하다고 생각했을까? “간단한 수술인데 뭐, 바쁠 텐데 뭣 하러 여기까지 왔어?” 그 한마디가 그렇게 쓰라렸다. 잃을까 불안한 마음에 주섬주섬 보답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지만, 이미 기회가 다 지나간 것만 같다.



 나는 부모에게 받은 것을 이제야 감사하고 있다. 아버지의 딸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우리 아빠’가 내 삶에 얼마나 큰 존재인지 생각한다. 아빠표 숭어매운탕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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