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보란 듯 잘 살아가면 더 바랄 게 없다.
우체국에서 법원 우편물을 전달해 주고 갔다. 뭐지 싶어 뜯어 보니 그 인간이 강제 면접 교섭권 심판 청구를 했다. 나는 바로 법원 민사과로 달려 갔다.
아이가 전화로 만나기 싫다고 말했다. 아이 의견을 무시하고 어떻게 이렇게 또 아이 정서를 괴롭힐 수가 있나 싶어서다.
합의 조정문에 분명히 본인(아들)의 의견을 고려해 면접을 한다고 돼 있고 서로 사인을 했다. 변호사도 아이가 만나기 싫어하면 법이라 해도 강제로 만나라고 할 수는 없다는 설명까지 해줬다.
나는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학원 끝나고 나온 아들과 차를 마시러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강제 면접 청구건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
하지만 참았다.
아들이 한 쪽 발에 깁스를 한 지 한 달이 넘고 있었다. 3주가 넘게 깁스를 하느라 씻지도 못한 한 쪽 발은 피부병까지 생겨 버렸다.
폭염과 소송으로 힘들던 여름에 한 쪽 발에 깁스를 한 채 목발까지 짚고 다닌 아들이다. 고생하는 어린 아들을 위해 나는 바다가 보고 싶은 걸 참았다.
그나마 3주 동안의 깁스를 푸르고 씻어도 되는 반깁스를 찼다. 한참 뛰어 놀고, 친구들 만나야 할 나이에 집콕을 하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다.
급한 동네 볼일은 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나 혼자 나갔다 오곤 한다. 그가 집에 들어 오기 전에 모든 볼 일을 다 보고 아들과 침대방에서 칩거했다. 동굴 속에서 숨어 있듯이 지낸 몇 개월이다.
모든 볼 일은 두 시간을 넘지 않는 선에서 마쳐야 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여름 방학을 맞았다.
아들은 깁스로 인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집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소송은 끝나 있었다. 일 년 넘는 재판까지 안 가고 조정으로 끝나 있었다.
원하던 대로 집에는 나와 아들만 남았다.
아들이랑 단 둘이 1박으로 기차 여행도 하고 싶었지만, 둘만 남은 여름의 끝을 집콕으로 보내며 새롭게 살아갈 앞날을 준비해야 했다.
바다가 보고 싶었던 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우리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소소하게라도 즐겁게 살자!"라고 외칠 수 있게 됐다.
"가끔 카톡이 왔었어. 얘기 나누기 싫어서 대답 안했어. 그런데 왜 대답 안하냐고 뭐라 하길래 귀찮아서 'ㅇ'이라고만 남겼어."
이제서야 들은 얘기다. 내가 그인간이 싫다고 해서 아들에게 강요할 수 없어 평소처럼 아들 의견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통화를 할 때도 그냥 태연한 척 밥을 먹고 참견하지 않았다.
"너는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연락하고 싶으면 연락해도 돼. 엄마는 네 의견을 존중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해 왔고,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
이혼을 했고, 공식적으로 서류 정리가 다 됐다 해도 생물학적인 엄마와 아빠란 사실 때문에 끝나도 끝나지 않은 거 같은 찌꺼기가 남아 있다.
내가 친권자라 당당히 보험사에 전화해 그가 아들 이름으로 가입한 보험을 해지 신청까지 했다.
아들은 자신의 말을 무시 당하고 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아들은 아빠에 대한 감정만 안 좋아지고 있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