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전쟁 같은 직장 생활을 보낸 토요일, 새벽 6시 20분에 일어났다. 통장에 4만 7천원이 다였다. 더 자고 싶었지만, 폐렴이 다 끝나기 무섭게 또 축농증을 격으며 2달째 약을 달고 사는 아들을 위해 병원에 가야 했다. 기침이 3주째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는, 기관지염에 시달리고 있는 나를 위해서도 병원에 가야 했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다닌 단골 이비인후과는 새벽 6시 30분부터 가서 오픈 전 문 앞에 줄을 서 있었야 했다. 그러다가 8시가 되면 병원 수첩에 시간 별로 진료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놓는 예약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일에 가지 못한 병원을 가기 위해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 잠들어 있는 아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대문을 나섰다. 집에서 걸어서 10분이 안되는 거리를 걸어 단골 이비인후과에 도착했다. 그렇지, 내가 1등이다.
그렇게 첫 번 째로 예약을 해 놓고 집으로 바쁘게 돌아 왔다. 잠들어 있는 아들을 깨워 채비를 끝내고 9시까지 병원으로 갔다. 아들이 진료 첫 순서였다. 그 다음이 나였다.
"항생제를 안 쓰고 지켜 봤는데, 안되겠네. 이거봐 목으로 넘어 가는 부분에 누런 콧물."
의사 선생님은 코 엑스레이를 찍자 하셨다. 나는 순간 덜컹 했다. 통장에 4만 7천원 뿐이다. 가슴 조마조마하며 아무말 없이 기다렸다. 다행히 나와 아들의 진료비는 3만원이었다. 아들도 결국 항생제 처방을 받았다.
통장에 1만 7천원이 남았다.
약국에 가 일단 아들의 약 처방지만 내밀었다. 돈이 모자라면 아들 약만 탈 생각이었다. 다행히 아들 약값은 6천원 돈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내 약 처방지를 내밀었다. 내 약값은 1만 6천원 돈이었다. 가슴을 쓸어 내렸다. 간당간당 했다. 겨우 나와 아들의 약을 다 타 낼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아들과 집에 와 아침밥과 약을 챙겨 먹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잠 속에서 빠져 들었다. 온 몸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도 몸이 피곤하고 조금 힘든 듯 했다. 아들과 나는, 살아 내기 위해 정신 없이 견뎌낸 한 주의 끝인 주말의 첫 날을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보냈다.
잠으로 점령 당해 버린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나는 걱정이 됐다. 월요일에 아들 등교는 어떻게 시키지, 출근은 무슨 돈으로 하지, 12월까지 어떻게 버텨 내면 되는 거지, 일요일에 교회는 어떻게 가지, 이번 크리스마스에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거지, 내 머리속에는 앞으로의 일들로 물음표만 가득 했다.
내가 지금 계속 살아 낼 수는 있는 건가, 계속 버틸 수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몽롱한 내 머리 속에서 멤돈다.
삶은, 우리의 일상은 살아내지는 것이고 살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이혼하고 싱글맘의 첫 걸음이 너무 힘들고, 계속 되는 허덕임과 돈이라는 벽을 마주하게 된다. 후회되지 않으세요? 다른 분들에게는 이혼하고 싶어도 참고 살라고, 이혼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지 않으시냐고 할 거다.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힘들다. 소송에, 가정적이지 않았고 뻔뻔하게 이기적인 그 비양심으로 양육비까지 나 몰라라 한다. 1년은 하루하루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다. 그나마 이제 취직이라도 했지만, 2월 달부터 생활비가 끊겨 버린 상황에 생활로 돈을 계속 안 쓸 수는 없으니 경제력이란 벽에 계속 부딪혀 버린다.
아들을 제대로 먹이기 위해 나는 계란 후라이에 김치만 놓고 밥을 먹는 게 일상이다. 생일 선물로 받은 쿠폰으로 빵을 사서 쟁겨 놓고 하나씩 먹으며 한 끼를 해결하기도 한다.
내 친구의 회사 동료는 이혼하기 위해 5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악착 같이 돈을 모아 1억을 모았단다. 그래서 내년에 이혼하려고 한단다. 그 분은 나처럼 남편이 상간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성격 차이와 가정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정 떨어짐이란다.
어쩌면 이혼도 준비가 필요한 지 모른다. 그렇게 경제적 준비가 어느 정도 된 다음에 해야 덜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항상 그렇게 준비하고 나서, 준비가 된 채로 일어나지 않는다.
참고 살아 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더는 참아 낼 수 없는 부분들은 존재한다. 참아 낼 수 없는 부분들을 계속 참아 가며 함께 살아가는 것은 혼자 살아가느니만 못하다는 걸 느낀 한 해 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어차피 이겨내야 할 부분들이 두려워 이혼을 하지 말라고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다. 그저 살아내지고 살고 싶어지는 인생에서 차라리 견뎌야 하는 고통이 있다면 견뎌 내고 새롭게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올해 초에 친구가 부모님에게 4층 짜리 건물을 동생과 공동 명의로 미리 증여 받았다. 코로나에 경제적 불황에, 힘들기만 한 우리 40대이다. 자식들이 갑자기 힘들어지는 걸 보고 미리 증여해 주시기로 결정을 하셨단다.
나는 건물주 된 친구가 부러웠다. 그런데 친구는 증여세 내느라 대출을 받고, 임대료 받아도 재산세에 각종 세금 때문에 남는 게 없다고 툴툴 댔다. 건물주 소리 하지도 말라며 화를 냈다. 내가 내 부모에게 재산 증여를 받는데 무슨 세금이 그렇게 어마어마하냐며 처음으로 정치인들에게 욕을 했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게 낫지."
나는 친구에게 그렇게 핀잔을 줬었다. 그런데 내가 막상 현금이 돌지 않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게 어떤 건지 겪어 보니 그 친구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일단 살자 싶어 전세 준 집을 내놨다. 처음 샀을 때보다 이익을 다 못 건져도 전세 끼고 팔자 싶어, 내놨지만 팔리지 않는다. 지금 월세로 사는 집의 보증금은 계약이 끝나는 날에나 받을 수 있다. 가압류를 걸어 놓은 위자료는, 둘이 즐길 때는 '여보, 자기'해 가며 희희낙낙 그렇게 좋아하더니 뻔뻔하게 항소까지 걸어서 그 항소가 끝나야먄 받을 수 있다. 현금으로 융통이 안 되니 생활은 계속 힘들기만 하다. 내년 초에야 좀 정비 되고 안정을 잡을 거 같은데, 그 내년 초까지 버틸 수 있으냐가 관건이 돼 버렸다.
그나마 이제라도 제대로 취직이란 걸 한 거 같은데 마지막 두 달이 또 다시 고비다. 살아 내기 위해 출근을 해야 하고, 살아 가기 위해 버텨야 하는데 차비조차 끊기는 악순환이 또 다시 시작 됐다. 약값을 걱정해야 하는 통장의 너덜너덜한 상태가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초등 아들은 그래도 엄마 따라 온 게 후회가 되지 않는단다. 얼마 전, 지 아빠라는 그 인간의 전화도 안 받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연락도 오가지 않는 눈치다. 아들은 엄마가 돈이 없어도 그 인간에게 가고 싶지 않단다.
아들과 나는, 거리에 장식된 대형 트리들을 보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소원을 빌어 보는 중이다. 로또라도 한 번 돼 주었음 하고 소원을 비는 중이다. 아들은 천 만 원 짜리라도 됐음 좋겠단다. 나는 이제 일등 짜리 한 번만 됐음 좋겠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올 연말을 버텨내고, 살아내고, 내년 초에 안정을 잡기까지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 준비 없이, 2024년을 배신과 상처로 얼룩덜룩 하게 보내 버린 늦깍이 이혼녀이자 싱글맘인 내 연말은 살아내지고 버텨내지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삶은 살아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그래도 매달려 보는 중이다.
12월에 법원에 가서 서류를 가져 와야 한다. 8월 28일에 첫 양육비를 입금하고 나서 9월, 10월, 11월 양육비를 입금 안한 그 인간을 3일 동안 유치장에 집어 넣기 위한 서류 접수를 해야 한다. 운전 면허 정지 신청을 해야 한다. 3개월의 양육비 입금을 안한 대가는 아직 그 정도다. 1년이 지나야 그 인간을 상대로 압류도 할 수 있고, 출국 금지도 신청할 수 있다.
너희가 준 상처 만큼 나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줄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아들과 살아 나가길, 살아 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