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장님의 한숨 소리에 미안했다. 기 죽을 거까진 없지만, 스무살 때와 다른 내 굳은 뇌와 느려진 머리 회전이 원망스러웠다.
사무 경리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회사에 맞춰 일을 해 보겠단 약속과 다짐을 하고 들어 왔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작은 컴퓨터 모니터 한 대가 놓여 있고, 그 모니터 속에는 숫자로 가득한 프로그램 시스템과 엑셀이 나를 반겼다.
경단녀 11년 만인게 문제가 아니다. 나이 오십이 다 돼 가는 나의 굳어가는 뇌와 다소 느려진 머리 회전이 문제였다. 안그래도 허덕이는 상황에 점심 밥도 제대로 안 먹고, 하루하루 출근해 가며 버티고 있다. 그런데 나의 뇌는, 나의 머리 회전은 '아 아 아---악'이란 소리가 스스로 나올 정도로 멘붕이다.
항생제에 약이 너무 쎄서 도저히 운전을 하기가 힘들었다. 계속 졸렸다. 잠을 푹 자도 졸렸다. 긴장이 조금만 풀려도 몸이 노곤해지며 쳐지는 기분이었다.
2주가 넘게 계속 되는 기침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나는 유일하게 마스크를 쓰고 출근을 한다.
아들 혼자 학교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서 아침밥을 챙겨 먹인 뒤 아들 친구네 집에 일찍 데려다 준다.
아들 친구네 아파트는 바로 학교 옆이다. 아들 친구의 엄마인 언니는 시간이 되면 출근을 하고, 아들은 친구와 함께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간다. 항상 친정 언니처럼 챙겨 주는 언니의 배려가 너무 고맙다.
기를 쓰고 헐레벌떡 사무실로 출근하면 배달 매니저 일을 경험 했어서 그리 낯설지 만은 않은 직영 사무실 안의 책상 앞에 앉는다. 대형 냉장고 안에 있는 신선 제품들의 재고를 체크하기도 하고, 판매 실적을 매일 입력해야 한다.
한 개에 220원 하는 제품부터, 한 개에 3,700원 하는 제품까지 다 돈이다. 그 돈들을 지켜야 한다.
재작년에 배달 매니저 할 때 거의 다 마셔 보고 먹어 봐서 크게 낯선 제품은 없다.
나이 50대에서 60대가 대부분이고 70대도 있으신 매니저 여사님들의 각기 다른 성향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 정도 나이 때에, 배달 매니저로 오래 일하신 분들은 이미 프로다. 말투가 무뚝뚝 하실 수도 있고, 잔소리가 많으실 수도 있고, 깐깐하실 수도 있고, 천사 같으실 수도 있고, 성격 급하고 빠르실 수도 있다.
각자의 성향이지 나쁜 뜻이나, 못된 분들은 안 계시기에 나는 잔소리나 깐깐함에 상처 받지는 않는다. 그저 무뚝뚝 하게 던지는 말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성격일 뿐이다. 이 나이에 기분 나쁠 일도 특별히 없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판매 실적을 제대로 맞추고, 한 개 한 개 다 돈인 제품들을 제대로 된 수식으로 꼼꼼하게 체크하고 수량과 입금 현황을 틀리지 않게 파악하는 부분이다. 메뉴도 많은, 이 회사의 홈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숙지하는 부분이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을 무지하게도 싫어하던 나다. 수학 책은 잘 들여다 보지도 않던 나다. 그런 내가 경제력을 키우고 살기 위해 사무 경리 일을 하게 됐다. 일에 있어서는 지는 걸 싫어하는기 내가, 숫자로 가득한 수식과 실적 맞추는 일을 제대로 적응해 내야만 한다.
하루에 글은 어설프게라도 5장 이상이나 시 몇 개라도 써 낼 수는 있지만, 나에게 있어 수식과 숫자는 의미가 다르다.
출근은 계속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대로 계속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HY야쿠르트의 사무 경리로 경제력의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고 이어 나갈 수 있을까?
재작년에 HY 배달 매니저에서 어떻게 또 이리 인연이 돼 이번엔 사무 경리다.
이번에 일 하면서 소설 '골목 수사대'도 새롭게 재정비해 완성하고 싶다. 이 회사의 전동 배달 차인 '코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소설이기에 나에게는 이번 기회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다.
첫 출근하고 갑작스레 내 몸을 괴롭힌 고열 때문에 약 기운으로 버티며 출근하고 있는 데다, 업무 숙지에 정신이 없어 글 쓸 시간이 여의치 않다. 점심 시간에도 약 기운에 멍해서 노트북을 챙겨 가지고 가도 겨우 30분 제정신으로 글을 쓸까 말까다. 주말에는 병원 다녀 오랴, 쎈 약 기운에 쓰러져 졸고 자느라 정신이 없다.
일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면 점심 시간에 매일 조금씩이라도 글을 쓰는 게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엄마, 사랑해.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아침에 데려다 주고, 저녁에 부랴부랴 데리러 가는 아들의 애교에 나는 하루의 고단함을 위로 받는다. 그렇게 꽁냥꽁냥 하고 서로 꼭 껴안다가도 집에 오면,
"물, 나 힘들어. "
"네가 해. 저녁이라 빨리 청소기 돌리고 엄마도 쉬어야지."
"엄마가 안해 줘서 그러잖아."
"아들, 너 이제 애기 아니거든. 네가 할 수 있잖아."
"조금만 기다려."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일찍 자야지. 지금해, 얼른.
나는 그렇게 또 아들과 투닥투닥 하루를 마무리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더는 아무 일 없이 이만큼만 유지하고 살아가며 감사하게 해 주시길 마음속으로 기도 한다. 내일도 무사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시길 감슴 속으로 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