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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Sep 19. 2024

오리와 페트병

런중일기 14. 강의 부유물에 대하여

아직 초보 러너라 1분, 2분 간격으로 끊어가면서 달린다. 달리는 사람이라기보다 걷는 사람에 가까운 상태지만 왠지 달리는 사람이라고 알리는 것이 더 강하고 멋져 보인다. 달릴 때는 호흡하는 것도 벅차기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겨를이 없다. 30분 정도 달리는 루틴을 마치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세상의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서쪽에 살고 있는 까닭에 한강의 넓은 하류를 구경하며 오늘은 강 위에 뭐가 떠 있나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죽은 것을 발견하는 것도 그날의 발견에 속한다. 살아있는 것은 갈매기와 가마우지, 청둥오리와 붕어 같은 것이다. 물 가까이에서는 뱁새와 참새, 고양이와 거미, 애벌레와 풍뎅이들이 가끔 보인다. 심지어 개구리까지! 날이 따뜻할 때보다 추울 때 발견하는 것이 더 흐뭇하다. 여름보다 겨울에 한강의 새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살이 에이는 추위를 강 한가운데서 견딜 수 있는 새들의 몸은 경이롭다.


한강에서 새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 걸을 때의 시선은 앞을 보되 옆을 본다. 앞을 보는 시선은 사람을 걸러내고, 옆을 보는 시선은 강 위에 떠다니는 것들을 포착한다. 해 질 녘이면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오리인지 페트병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닌, 오리와 페트병의 시간이다. 그것은 때로는 나뭇잎과 물고기의 시간이 되고, 죽은 쥐와 비닐봉지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해 질 녁에 한강 길을 달릴 때면 오리와 페트병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저 페트병은 누구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걸까? 그 사람을 위해 변명해 보기라도 하듯 쓰레기통에 잘 갖다 버린 페트병이 바람에 굴러 한강으로 떨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는 수면 위에 부유물 차단 망이 있어 쓰레기가 한강으로 함부로 떠내려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안양천 하류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며 온갖 부유물이 둥둥 떠 있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치울 것을 생각하니 그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가끔은 내가 그 일을 하면 어떨지 생각도 한다. 배에 올라 강에 떠다니는 것들을 건지는 일은 고단하겠지만, 뿌듯할 것 같다.



그저께는 나들목 입구에 있는 벤치 앉아 페트병을 한강으로 던지는 남자를 보았다. 옆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남자가 페트병을 던지고 나서 둘은 태연스레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한강을 바라보며, 그 남자의 뒤에서 멍하니 내가 오리로 착각하게 될 페트병의 기원을 알아버렸다. 그들의 앞으로가 얼굴을 한번 훑고는 나의 러닝 코스를 시작했다. 달리고 걷는 동안 그 남자의 모자를 벗겨서 한강으로 던지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다. 벗겨서 던지는 척만 할까, 그냥 던져버릴까. 아니면 폰을 뺏어 던져버릴까. 무얼 던지면 그들을 더 열받게 할 수 있을까? 아니, 한강에 뭔가 던지면 또 쓰레기를 만드는 꼴이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달렸다. 달리기에 집중하기가 힘든 날이다. 나는 헐크가 되었다가 불도저가 되었다. 피지컬 좋은 까치가 되어 모자를 훔쳐 달아나면 어떨까는 상상에 이르러서 상상하기를 그만두었다. 반환점을 돌고, 그 남자가 페트병을 던진 자리로 다시 오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떠나고 없었다. 다시 페트병 생각이 났다.


그 남자 손에서 한강에 이르게 된 페트병은 인천 앞바다에서 서해로, 그러고는 대만해협으로 여정을 떠날까? 페트병에 남아있는 그 남자의 유전자는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까? 바다를 떠돌다가 또 누군가에 오리 또는 갈매기로 오해를 받을까. 언젠가는 육지에 다시 닫게 될까?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한강 하구 김포 반도와 강화도 사이의 염하에 부유물 차단시설이 따로 있다고 한다. 아마 페트병은 거기서 여정이 끝날 확률이 클 것 같다. 진짜 오리는 거기에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24년 4월 17일 수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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