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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Sep 25. 2024

달리며 쓰는 글

런중일기 16. 부디 오늘, 열 문장이라도

나는 주로 말하는 편보다 듣는 편의 입장에 선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편이라 막상 어떤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요점만 짧게 압축하게 된다. 그 때문에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실제로 달리 때도 별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다. 여름밤에도 더위를 쉽게 먹어서 체온과 호흡 조절이 안 되는 증상을 몇 번을 겪다가 러닝 휴식기에 들어섰다가 이제 날이 선선해져 다시 달리려고 하니 처음 달렸을 때와 같은 체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뜀박질을 시작하면, 자세와 통증, 남은 시간, 호흡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 딴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이어폰 속에서 알려주는 러닝 코치가 말한 뛰는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나의 글쓰기는 인터벌 주법의 걷기 타이밍일 때 주로 이뤄진다. 말 그대로 ‘런중일기’. 뛰다가 쓰는 일기가 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주제는 집에서 한강길을 나서는 동안, 한강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주로 발견하게 된다. 한 번씩 오가는 길을 달리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며 글의 주제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풍요로운 글감은 다채로운 경험과 관찰에서 얻어진다는 걸 알기에 더 많이 보고, 겪었으면 한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마감이 없으면 한없이 게을러진다. 그 때문에 런중일기도 연재를 결심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달릴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생각이 정리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숨어져 있던 내 말들이고, 발견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바람에서, 강물에서, 잎사귀와 구름, 뜀박질과 거친 호흡에서도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자주 그 말들을 잊어먹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 같은 말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중얼거림은 글로 써질 때까지 지속된다.



한때는 작은 용기를 내는 것에 대해서, 한때는 나를 사랑하러 오는 것들에 대해서 3주를 생각했다. 좋은 것들을 오래 생각하다 보니 그동안은 머릿속이 맑아졌다. 떠올리면 미소 지을 수 있는 것들을 구구단을 외듯 계속 되뇌는 것이 나름의 습관이 된 것 같다. 최악의 순간에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다행히도 내가 달리는 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초록의 것들과 어둠과 조화롭게 어울린 것들,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것들, 그러면서 뿌리째 뽑히지 않는 것들. 물론 슬픈 것도 있다. 어제는 내 팔만한 물고기가 죽어 강물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그 슬픈 것들을 달리며 한 번 더 기억해 두려고 했다. 애도의 마음과 함께 다음의 슬픈 것들에 익숙해지려 스스로를 달랬다.


집으로 돌아오면 좋은 것도 슬픈 것도 글로 옮긴다. 말이 글이 되기도, 빛과 감각이 글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때마다 타임머신을 탄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때의 나로 돌아가 맡았던 향을 찬찬히 들이킨다. 그럴 때마다 달리고 있는 내가 애틋하고 기특하다.


글로 옮겨지면 그때의 말이 전혀 다른 말이 될 때도 있다. 말을 풀어내는 나의 힘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달리면서 하는 말과 앉아 쓰는 말의 향기와 감촉이 말이 묵혀지는 동안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생각으로 맴돌던 말이 한없이 거칠었다가 글로 다듬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그저 혼잣말이었던 말은 함께 읽는 글이 되어야 하니까.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벅참과 동시에 염려가 든다. 읽는 동안의 시간을 내 글이 가져오는 것이기에 그 시간이 낭비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늘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달리며 주워들은 것들의 말이 그대에게 몽글몽글 맺히기를 아주 작게 입에 담아본다.


2024년 4월 19일 금요일에 발견한 이야기를 2024년 9월 25일에 씀.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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