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 Oct 02. 2024

버드나무의 노래

런중일기 16. 기다릴게 또 보자

늘 걷기만 하다가 러닝을 하게 되면서 얻은 큰 재미 중의 하나는 다다르는 거리가 저절로 늘어나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걸을 때는 저기 멀리서만 바라만 보던 풍경이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곳에 펼쳐진다. 그 풍경 중의 하나는 한강 하류 쪽의 버드나무 두 그루다. 하나는 조금 작은 버드나무로 한강을 향해 잎을 떨구고 있고, 하나는 그 크기가 커서 걷는 길가 쪽으로 자기 몸의 반의반 정도 되는 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큰 버드나무 아래를 지나가면 버드나무 이파리가 정수리를 쓰다듬기 때문에 살짝 고개를 숙여 지나간다. 작은 키의 나도 우쭐할 정도로 늘어뜨린 나뭇가지에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이 나무가 나에게만 사랑받는 것을 아닐 것이다.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드나무의 정취를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전에 살던 봉제산 아래 공원에는 한강의 이 버드나무의 다섯 배가 훌쩍 넘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공원 개울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는 자주 걷지도, 뛰지도 않을 때였지만, 그 커다란 버드나무를 보러 집 근처 공원을 자주 찾았다. 바람이 불면 버드나무의 잎사귀가 새가 깃털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내듯 하늘 위로 뻗어가는 화음을 만들었다. 그 소리를 공원 전체를 메우는 것 같아서 버드나무 숲이 주위를 모두 에워싸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릿속을 꽉 채우던 걱정과 고민거리들이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버드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 버드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서 버드나무 주위의 그늘진 벤치에는 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봉제산 아래 큰 버드나무


오래된 나무들이 마을의 당산나무로 모셔지고, 보호수로 지정되는 것을 보면 커다란 나무는 인간을 압도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 힘은 모든 기운을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게 해주는 능력이 있어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이내 편안하게 해주곤 했다. 나무에도 목소리가 있다면 오래된 나무는 모두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아닐지 상상해 본다. 그 속도도 적당히 느려서 나무의 목소리를 잠자코 귀 기울여 듣고 있을 것 같다.


달리기할 때의 나무들은 알게 모르게 페이스를 조절해 준다. 나무와의 거리를 재면서 발디딤 속도를 늦추거나 높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더라도 저기 저 나무까지만, 그리고 다시 저 앞의 나무까지 달리기를 이어 나가며 오늘만큼의 기록 경신을 시도해 본다. 그러면 나무도 가지를 흔들며 잘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내일의 게으른 나를 위해 기다릴게 또 보자고 말해줄 것 같은 늘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 나무는 기점이 되고, 안식처가 되고, 종착지가 된다.


나무를 보려면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하며 오늘의 달리기는 계속된다. 갑자기 그곳의 나무들이 보고 싶다.


2024년 9월 2일 월요일에 발견한 이야기.

※ 밀리로드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이전 15화 달리며 쓰는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