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스름이 돋아났다

202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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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만 껴안은 채 살아온 날이

인생의 반이 넘는다고

내 상처만 들여다보다가,


문득 내가 당신에게 준 상처는

얼마만큼이었는지,

그 상처가 지금

당신 인생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무서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상처를 메우고,

흉터를 없애주고 싶었다


당신의 상처에 후시딘을 바르고,

뽀로로 밴드를 붙여주고,

어디 멀리 간다면 업고 데려다주고,

몸에 좋은 것만 먹이고,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상처가

손가락 마디보다 작아질 수 있을 거라는

어긋난 확신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러다 손톱 옆에 돋아난 거스름 때문에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날을 보내면서,

이렇게 작은 조각도 온 신경을 건드리는데,


그 마음의 상처는 웃음 하나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낸 상처는

나로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최선을 다해 도망가는 거였다


멀리, 멀리,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사라지는 거였다




작가노트 | 거스름이 돋아났다


이 글은, 상처를 준 사람이 오히려 그 상처에서 오래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처받은 쪽이 더 오랫동안 고통받을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상처를 준 쪽 역시 그 기억에 오래 갇혀 있기도 해요.

그 마음은 죄책감일 수도 있고, 그리움일 수도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의 무력함일지도 몰라요.

나는 한동안 내가 받은 상처에만 몰두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사람에게 남은 흉터가 어쩌면 지금도 그를 괴롭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숨 막히게 두려워졌어요.

‘미안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죠.

후시딘을 바르고, 뽀로로 밴드를 붙이고,

좋은 걸 해주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던 마음은

사실 상처의 깊이를 모른 채 했던 어리석음이었는지도 몰라요.

작은 거스름 하나에도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는데,

그 사람의 마음에 남긴 건 얼마나 클까.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상처는 내가 준 만큼, 내가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도망치는 걸 선택했어요.

어설픈 위로보다, 닿지 않는 거리를 택한 건

오히려 그게 마지막 남은 미안함의 표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이 글은, 상처를 남긴 쪽이 오히려 더 오랫동안 기억하고,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조금 늦은 사과를 꺼내보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이 글은 ‘오후 여섯시의 고양이’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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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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