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퇴사 소문을 듣고 같은 지점에서 일한 적 있던 선배가 술을 사겠다며 불러냈다. 함께 친분이 있는 동기 오빠와 셋이 모인 자리였다. 삼겹살에 소주를 홀짝이며 추억을 곱씹다가 서로 칭찬 한 마디씩 거들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즈음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본론을 꺼낸다.
-니 도대체 왜 그만두는데? 나가면 할 거 있나?
-그냥.. 저랑 안 맞아서요.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 따위야 101개쯤은 거뜬히 써낼 수도 있지만 그의 눈에는 고작 이런 걸로..?라는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하므로 그냥이라는 말로 퉁친다.
1년 전에도 이미 회사에 퇴사 소동을 부렸던지라 예전처럼 강경하게 말리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사이에 3번의 인사이동을 하며 본점에서 만만치 않은 사람의 정신교육을 받느라 회사 내에선 오죽하면 저럴까라는 동정 여론이 생겼기 때문이다.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노. 회사는 그냥 취미로 다녀라. 나처럼.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더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의 말처럼 회사를 취미로 생각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였다. 선배가 취미로 회사를 다니는 동안 담당자 없는 업무들은 밑으로, 밑으로, 그러다 힘없는 하위 직급에게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2차를 가자고 떼쓰는 선배를 겨우 떼어내고 동기 오빠와 둘이 남았다.
-씹새끼. 지 같은 것들 때문에 그만두는 줄은 모르네..
고기까지 사주며 새 출발을 응원해준 선배에게 헤어지자마자 상스러운 욕을 해댄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옆에 있던 동기 오빠가 허리를 젖혀대며 꺽꺽 소리로 웃지 않았다면 난 내가 씹새끼라는 말을 내뱉었는지도 몰랐을 만큼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선배가 안 하면 내가 대신하면 되지.'라는 아주아주 바람직한 마인드의 동기 오빠처럼 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안되었다. 나는 고작 무수리인 주제에 직원이 가져야 할 책임감에 대한 기준은 엄격해서 직원이 할 최소한의 일 조차 하지 않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속 분노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치밀어올랐다. 내겐 너무 당연한 그 최소한의 기준이 그들에겐 너무 높은 기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선배는 업무 A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준다더니 다음날에 왜 A를 해놓지 않았냐며 몰아붙이던 사람이다. 그와 한번 더 술자리를 한다면 그때도 아마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 한 번 그 상스러운 욕을 나지막이 내뱉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화폐 유통에만 적용되는 법칙은 아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