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거짓말하지 마, 네 아이잖아

다시 만난 너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by 회복하는돌


혜지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3년 후였다. 나는 졸업 직후 이름 있는 출판사에 취직해 국내 문학부의 신입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은 앉아서 하면 되어 정적이었으나 책 출간을 앞두고는 자주 야근했다. 그날도 야근을 위해 근처 샌드위치 집에서 야식을 사 가려던 참이었다.


“정수진?”


처음에는 너를 못 알아볼 뻔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쩍 말라진 몸. 펑퍼짐한 원피스 차림의 너는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 달랐으니까.


“국문과 수진이 맞지? 아 너무 오랜만이다, 진짜.”

“혜지야, 이게 얼마만이야.”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니, 아주 작은 남자아이가 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귀엽고 똘망똘망해 보이는 아이.

나는 그 애가 너와 선배를 반씩 닮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너를 두고 떠돌았던 그 소문을 진실로 믿었기에 더 그래 보였던 것 같다. 너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 근처에서 일하는 거야?”

“응, 나 동녘사 국내 문학부에서 일해.”

“와, 진짜? 너무 잘됐다. 너무 부러워. 역시 넌 뭘 하든 잘될 줄 알았다니까? 일이 힘들진 않아?”

그렇게 푼수 같은 말투는 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많이 놀랐다. 남자아이가 혜지

의 다리에 달라붙어 머리를 비볐다.


“이 애는....”

“아, 인사해. 우리 조카 준혁이. 우리 언니 아들이야. 귀엽지?”

너에게서 언니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딱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이 야밤에까지 자기 아이를 남에게 맡길 리 없다는 생각. 육아에 찌든 듯한 너의 차림새. 너를 닮은 얼굴.


마지막으로, 내게 오랜 시간 연락하지 않았던 너에 대한 배신감까지.

만약 네가 정말로 아이를 낳은 거였다면, 더더욱 연락이 힘들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너에게 상처를 내고 싶었다.

내가 사실이라 믿은 것들과 너에 대해 느껴온 모든 감정이 내 안에서 뒤섞이기 시작하며, 그 무엇도 참을 수 없어졌다.

“혜지야. 내 앞에선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들릴지 다분히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 너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네 애잖아, 이 애.

너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

너의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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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신 치아바타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때마침 직원이 너의 메뉴를 불렀고 너는 아무 말 없이 메뉴를 받아 들더니 돌아서 나갔다.


그 애가 네 애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마. 진짜 너로 살아. 넌 다 감추고 있는 거야.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 척하면서, 정작 네 삶에서는 누구보다 미련한 짓들만 골라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너를 가르치고 싶었다. 훈계하고, 단죄하고 싶었다. 내게 그럴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라리 네게 따졌어야 했다.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왜 나를 버렸느냐고,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멍청한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그 남자들보다 내가 못한 존재였냐고.

그러나 혜지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 대답이 무엇이든 내가 혜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걸 인정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너를 두고 함부로 떠들던 그들과 내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게.


“이모, 이모. 먹으 꺼야?”

‘자기 애한테도 이모라고 부르게 한대. 진짜 독하지 않니?’


너의 손을 잡아끄는 아이가 너를 이모라고 부르는 걸 들었음에도, 나는 한 동기의 증언을 먼저 떠올렸다. 너의 안색을 살피는 그 애가 눈치가 빠르고 영특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문은 그 소문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밖에 없으면, 더 이상 소문이 아니게 된다. 어느 쪽이 진실이건 간에 그 소문의 대상을 상처 주고 싶은 마음밖에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렇게 너는 영영 내 곁에서 떠났다. 그 순간에도 너의 말을 단 하나도 믿지 못하고 있는 나를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