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이상한 교육이 있다. 기업에서 이 교육을 진행하겠다고 하면 갑자기 퇴사자가 발생한다. 그것은 ‘저성과자 교육’이다. 만약 이 교육 대상자가 20명이라면 실제 교육에 참여하는 인원은 5명 수준이고, 나머지 15명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 교육의 목적은 오랫동안 성과가 낮은 직원들을 위해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업무로 배치전환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매우 이상적인 목적을 가졌지만 사실은 또 다른 속내도 있다. 그 속내를 구체화하는 것이 ‘저성과자’라는 낙인이다.
이 낙인은 대상자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한다. 그것을 자기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노출되어 받게 되는 고통까지 더해진다. 회사에서 저성과자 교육을 공지하고 그 대상자가 통보되는 순간, 이러한 낙인의 고통이 따라오게 된다.
설사 그 통보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교육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비밀이 유지되기란 어렵다. 이런 소문은 의외로 빨리 퍼지기 마련인데 그로 인해 생기는 현상들, 즉 나의 성과가 나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그 소문을 접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오히려 나의 발목을 잡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어쩌면 저성과자라는 낙인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또 다른 낙인 ‘스티그마(Stigma)’가 무서운 것이다.
이 스티그마가 저성과자 교육의 실상을 대변한다. 이 교육을 거부할 권리가 없는 대상자가 스티그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발적 근로계약 해지(사직서 제출)’이며 그것이 저성과자 교육에 참여하는 인원이 항상 적은 이유가 된다.
간혹 이 교육을 의뢰하는 기업과 미팅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인사 책임자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그 기업의 의도를 읽으려는 노력이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명분은 명확하지만 속내는 감춰져 있다. 속내는 언어를 쓰지 않는다. 다만 언어와 언어 사이에, 그리고 맥락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을 곱씹으며 생략된 언어를 감지해야 한다. 그것은 회의실에 감도는 공기의 촉감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로 대화한다. 그리고 둘 중 하나를 유추해야 한다. 정말 대상자들의 성과를 높이기 위함일까? 아니면 퇴사 종용일까?
기업에서 말하는 저성과자란 어떤 의미일까? 정말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이 되는 성과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회사의 성과가 부족한 부분을 마치 사다리 타기처럼 타고 내려와 개인의 성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종의 인사고과 프로세스인가. 그렇다면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기업의 손실은 누구의 성과가 부족해서 일까?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손해가 발생했다면 누구의 성과가 부족해서 일까? 애당초 회사의 경영전략이 잘못되어 재무실적이 악화되고 조직운영에 효율성이 떨어져서 결국 인력 감축이 불가피하다면 이것은 누구를 저성과자로 지목해야 하는가.
그 책임이 가장 큰 사람들은 저성과자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저성과자를 지목해야 하는 입장일 것이다. 만약 개인적인 실적이 유일한 이유가 되고 그에 따라서 저성과자 교육이 합리적인 명분에 따라 진행된다면 이 교육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기업이 할 수 있는 ‘해고 회피 노력’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이후에 근로계약 해지가 진행되더라도 법적인 타당성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근로기준법이나 논의할 만큼 녹록지 않을 수도 있다. 기업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구조조정이나 인력 감축을 단행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된다. 회사의 실적이 앞으로의 재무 계획에 턱없이 모자라게 되면 설사 우수한 직원이라도 해고 리스트에 올려야만 한다. 이것은 그 직원의 성과 때문이 아니다. 회사가 재무 계획상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사의 문제며, 경영진의 책임이다.
만약 이 책임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명하지 않은 경영진이 저성과자 교육을 통해서 정리해고를 단행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임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도대체 누가 저성과자라고 욕할 수 있을까?
저성과자라는 낙인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스티그마다. 낙인은 낙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낙인은 무성한 소문을 양산하며 증권가의 ‘찌라시’처럼 ‘카더라’ 통신과 가십이 난무하게 되고 결국 누군가의 성과가 아닌 인격을 손상시킨다. 이것이 스티그마다.
문제는 이 스티그마가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이다. 잘못된 낙인은 ‘찍힌’ 사람이 아니라 ‘찍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 저성과자 교육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임직원들은 그 교육의 명분과 속내를 따져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임이 원래 누구에게 있느냐가 무성한 소문을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의 손상을 입는 것은 저성과자일까 아니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