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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빛 Jan 22. 2022

엄마,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지?

콧구멍이 엄청 커져도 사랑해.

콧구멍이 엄청 커져도 사랑해.

남편이 아이들에게 레모나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게 준이 민이에게는 별미인가 보다. 주의사항에 보면 '8세' 어린이부터 한 봉지를 전부 입에 털어 넣어도 된다고 하니, 여기에서 준이와 민이의 운명이 갈린다. 비록 11월 생이지만 여덟 살이 된 준이는 한 봉지를 다 먹는 것을 허락받지만, 민이는 아빠가 덜어내고 주는 만큼만 먹을 수 있다. 정확히는 아빠와 나누어 먹느라 혼자 한 봉지를 다 차지할 수 없다. 허락되지 않는 것은 욕망을 키운다.







오늘 저녁 일이다.


씻기려고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온도를 맞추며 민이를 불렀다. 민이는 요즘 숨는 재미에 빠졌다. 절대로 먼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또 장난 삼아 숨었나 싶어서 단골숨기(?) 공간으로 찾아갔다. 역시나 민이는 안방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몰래 다가가 툭 건드리면 까르르 뒤집어지며 나올 민이를 예상했다. 그런데 민이는 내 손길에 평소와 달리 화들짝 놀라면서 벌떡 일어났다. 나를 돌아본 민이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레모나 안 뜯었는데?"


"(뚀잉)....아... 레모나 안 뜯었어? 그럼 안 뜯은 봉지 엄마 줘."


민이는 레모나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전혀 모를 수 있었는데, 순수하고 투명한 아이의 표정이 봉지 하나를 숨겼다고 말하고 있었다.


"민아, 다른 봉지도 엄마에게 줘."


내가 내민 손바닥을 바라보면서 민이가 세상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꼈는지 커튼을 젖혀 찢어진 레모나의 윗부분을 주워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한 봉지 뜯어먹은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민아, 나머지 봉지도 엄마 주라."


"없....어....... 응?(아니 대체 이게 왜 여기에??라는 표정으로) 여기 있네에에에에?"



허허. 봉지가 텅 비어있었다.

뭐 한 봉지 다 먹었다고 어쩔까 싶었다. 비타민은 쉬로 나오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어제 아침에도 준이와 민이가 레모나를 찾기에 그냥 각각 하나씩 준 이력이 있는 나라서 민이를 나무랄 생각도 없었다.

내 마음은 오히려 미안함에 가까웠다. 몰래 먹은 것에 대해 큰 잘못으로 느끼고 있을, 잘못을 들켰으니 매우 난감할 아이. 민이가 많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나도 안 되는 걸 몰래 하다 들킨 경험이 적지 않게 있었으니 그때의 나를 만난 것인가 생각도 했다. 민이가 내가 어릴 적 느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같은 무게로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쁜 아이고, 내가 부끄럽고, 이렇게 혼나 마땅할 짓을 했다'라고 생각했던 나를, 지금 민이를 빌미(?)로 안아주고 싶었을 수 있다. 


어찌 됐든 민이 마음이 중요해졌다.


"민이 한 봉지 다 먹었네? 이제 엄마랑 씻으러 가자."


사실 손바닥을 내밀고 나에게 주라고 대치(!) 했던 이 시간은 다음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싶다. 분위기가 무거워서 위압감을 느꼈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내가 모든 상황에서  100% 상냥한 엄마는 아니기 때문에 조마조마하지 않았을까?






씻기는 동안 민이는 나에게 물었다.


"엄마,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지?"


(오, 피노키오 이야기도 알고 있네?)"피노키오는 코가 길어지지."


"코가 길어지면 어떻게 돼?"


하는데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코가 커지면 콧구멍이 엄청 커지지?!"


했으나 민이는 웃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덧붙였다.


"민아. 민이 코 길어질까 봐 걱정돼? 지금 엄마한테 레모나 봉지 줘서인지 코가 그대로 예쁜데? 그리고 민이 코가 길어져도 엄마는 사랑하고, 민이 코가 안 길어져도 사랑해. 언제나 민이는 엄마의 보석이야. 그런데 몰래 뭔가를 먹을 때는 엄마가 걱정이 돼. 특히나 그게 약일 때는 더 그래. 약은 자기 거 아닌데 먹으면 아프거든.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야 그에 맞는 약을 주실 텐데 민이가 안 먹은 척해서 엄마가 모르면 알려줄 수가 없어. 그러면 민이가 아파도 의사 선생님도 왜 아픈지를 몰라. 그래서 뭔가 먹고 싶을 때, 특히 그게 약이면 꼭 무얼 먹었는지 엄마한테는 알려줘."


했다. 민이는 반쯤 웃었다. 

민망한가? 안심됐나? 물어보지는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는 궁금해진다. 


그때 비폭력대화에서 배웠듯이


"엄마 이야기를 들으니 어때?"


하고 물어볼 걸 그랬다.


속으로는 이건 '두려움'을 자극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민이도 자신과 진심으로 연결되고 싶은 엄마 마음을 이해했을 거라 믿기로 했다. 이야기는 내일도 이어갈 수 있으니까. 내가 아이에게 '너 그러면 병원 가서 큰 주사 맞는다.' 이런 식의 협박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걱정하고 있다는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 그 마음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계속 나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워지고 있다. 축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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