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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Apr 06. 2022

사이 안 좋은 오누이가 같이 살면…

서울살이 몇 핸가요, 3-4년 차

3학년 2학기에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방을 구해 자취를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땅을 매입하시고, 주택을 짓기 시작한 때여서 자취방 보증금을 지원해주시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신에 부모님은 이렇게 제안했다.


“오빠랑 같이 사는 거 어때?”


당시 내 친오빠는 노원구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노원구에서 우리 학교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당연히 나는 자가용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고. 그 거리를 감안하고서라도 또다시 기숙사에 들어가기에는 너무도 질릴 만큼 질려있던 터라 나는 차라리 그나마 ‘예견된 불행’을 택했다. 그 불행이란, 사실은 지옥의 세 시간 통학 그 이상이었다.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험 삼아 기숙사에 지원도 했었고, 붙기도 했었다. 내가 기숙사 등록비를 내지 않으니 기숙사 사감이 전화해서 나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3학년 2학기에 어렵게 붙은 건데 좋은 기회 놓치는 거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또 최악의 룸메를 만날까 봐 나는 바보같이 기숙사에서 도망쳤다.


대부분의 남매 사이가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본래 친오빠와 사이가 좋은 것도, 성향이 잘 맞는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빠는 나를 시종일관 시종 부리듯이 별별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물 떠 와라, 불 꺼라 같은 하나같이 사소하고 번거로운 것들이었다. 또한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의 오빠에게 조용히 하라거나 시끄럽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같이 있는 시간 대부분은 서로 없는 사람인 듯이 지냈다. 그러다가 오빠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떨어져 살게 되었고, 그리고 오빠는 곧 군대를 가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서 오빠는 또다시 일본 교환학생을 1년 동안 갔기 때문에 서로 성인이 된 이후 대략 3년 간은 거의 교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도, 오빠도 어렸을 때와는 다르니까. 그러나 그건 나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다르긴 달랐다. 오빠는 나를 더 업그레이드된 방식으로 괴롭혔다. 짐을 갖고 오빠가 살던 자취방에 들어가기 전에, 오빠는 문예창작과 다운 글빨로 본인이 직접 쓴 A4용지 세 장 짜리 분량의 ‘집 사용설명서’ 써서 나에게 읽으라고 했다.(내 기억에 최소 이 글보다 길었다) 심지어 프린트하여 냉장고에 붙여놓기까지 했다. 그 종이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다. 걸레질은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 하고, 환기는 하루에 세 번씩 해라. 화장실을 쓰고 난 뒤에는 바로바로 머리카락을 정리해라. 머리카락은 바퀴벌레 먹이니까. 오래된 아파트라서 청소를 조금만 게을리해도 바퀴벌레가 나오니까 설거지도 바로바로 해야 한다. 정말로 바퀴벌레가 끔찍하게도 자주 출몰하기는 했다. 나는 이때 바퀴벌레 포비아를 얻었다. (그 단어를 계속 쓰는 것도 괴로우니 ‘그 벌레’라고 하겠다. 무슨 볼드모트도 아니지만 단어만 보는 것도 너무 싫은 걸 어떡하나…) 살충제에 그려진 그림만 봐도 소름이 돋았고 집에 그 벌레가 출몰하는 날이면, 그 벌레에 뒤덮히는 꿈을 꿨다. 아마 오빠도 이때는 그 벌레에 질릴 대로 질려서 강박처럼 청결에 신경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 그 정도만 하면 괜찮았다. 서로 청결하게 지내면 좋은 거니까.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빠는 자신만이 정한 아주 세부적인 집안의 규칙을 내게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방은 침실과 부엌 겸 옷방이 미닫이 문으로 구분된 1.5룸 구조였는데, 예컨대 침실에는 가방을 절대로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옷을 걸 때는 옷걸이 방향을 통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옷의 앞면이 향하는 방향도 일치하도록 걸게 했다. 두 칸으로 구분된 수저통에는 한쪽에는 숟가락과 젓가락만, 한쪽에는 가위나 국자 그 밖의 것들을 놓도록 했고, 나에게 수건을 접어서 칼각을 잡는 법을 알려주며 그렇게 접어서 수건을 정리하라고 했다. 이쯤 되면 지금의 오빠도 당시의 자신을 만난다면 굉장히 피곤해하며 같이 맞춰 살기 힘들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 당시의 오빠는 정말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인간이어서 나는 저 인간은 분명 혼자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을 깨고 오빠는 평균보다 훨씬 일찍, 스물일곱의 나이에 털털한 성격의 새 언니와 결혼하여 8년째 잘 살고 있다. 오빠도 그렇게 사는 동안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내가 동생이라서 나랑 같이 살 때는 나한테 맞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오빠의 공간에 내가 들어간 거니까, 당시의 그 까다로운 오빠가 말하는 것들을 나는 대체로 맞추며 살려고 노력했지만 원래의 내 생활방식과는 다른 부분을 끼워 맞춘다는 건 쉽지 않았다. 오빠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양보한 부분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서랍장이나 행거 한켠, 책상 한쪽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같은. 크지도 않은 1.5룸에서 둘이 산다는 건 어떤 룸메와 함께 하든 힘든 것이니까. 또한 예상했듯이 1.5룸이어서 서로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기 힘들었다. 통화할 때면 밖에 나가서 통화해야 했고, 옷을 갈아입을 때는 화장실에서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 것도 다 괜찮았다. 이미 기숙사 살면서 익숙해진 일들이니까.


어느 날 내가 결국 폭발하게 된 건, 내가 급하게 과제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 게 있었는데 ‘굳이’ 그때 청소를 하자고 한 것 때문이었다. 나는 과제가 급하니 과제를 끝내 놓고 하겠다고 했으나 오빠는 청소가 뭐 그렇게 오래 걸리냐며 청소를 먼저 하고 과제를 하라는 입장이었다. 원룸 청소를 둘이 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건 사실이니 오빠의 말도 틀린 건 없으나 그때의 나는 양보하지 못했고, 오빠에게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내 입장에서도 과제가 그리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었고, 청소를 한 시간 정도 미룬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 억울했다. 억울해하면서 들고 나온 노트북으로 카페에서 과제를 마친 다음,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어떤 말을 해주셨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중재는 해주셨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오빠는 한결 누그러진 모습이었고, 집은 깨끗했다.


그렇게 나는 오빠와의 불편한 동거를 일 년 반 동안 버텼다. 어찌 됐든 아주 큰 결심 없이는 친족과 절연까지 하는 건 힘든 법이니까. 오빠를 견디는 건 어차피 평생 해왔던 거니까 상관없었지만, 사실 나를 훨씬 힘들게 했던 건 왕복 세 시간, 지옥의 통학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지하철 7호선 북쪽 끝단에서 서울을 가로질러 서쪽 끝단까지 가는 경로라서 앉은 채로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때 지하철에서 현명하게 시간을 때우는 방법을 여러 방면으로 터득했다. 재미있는 팟캐스트를 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SNS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책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늘 어떤 콘텐츠에 몰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하루에 늘 세 시간씩 시간을 보낸다는 건 무슨 수를 쓰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티고 버티다 마지막 학기에 간신히 부모님을 설득하였다. 대학원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세 시간 통학을 이제는 버티지 못한다고. 실제로 이동시간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내 쓰레기 같은 체력이 버텨내질 못했다. 그 시기 즈음에는 오빠도 취업을 했고, 집을 지은 지 일 년쯤 지났기 때문에 우리 집에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도 생겼던 것 같다. 그렇게 4학년 2학기, 대학 생활 마지막 학기에 나는 드디어 자취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첫 자취방은 대략 20년쯤은 족히 되었을 법한 오래된 건물의 원룸이었고,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는 25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좀 해본 사람은 이 가격만 듣고도 안 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땐 몰랐다. 이제 정말로 더 큰 고생길이 열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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