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는 열차에서 내리기까지
서울살이 몇 핸가요? (1-12년 차, 2010.3 - 2022.2)
2010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한 일인 가구 가장으로서의 삶은 2021년 1월에 종료되었다. 만 10년이 약간 넘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꽤 다양한 주거형태를 거쳤다. 대학교 기숙사, 30년쯤 된 복도식 아파트, 30년쯤 된 분리형 원룸, 20년 가까이 된 투룸 빌라, 3평짜리 고시원, 3평짜리 원룸, 가파른 언덕 위의 5평짜리 원룸, 역세권의 5평짜리 원룸.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삶의 변화에 지역도 여러 번 옮겼다. 서울과 경기도 부천의 경계 역곡역과 온수역 사이, 노원구 하계역의 3분 거리, 양재역에서 3분 거리, 강남역에서 5분 거리, 낙성대역에서 5분 거리, 신림역에서 5분 거리. 주거환경이 어떻든 나는 늘 역세권을 택했다. 서울에 살 때는 집 자체보다 통근 거리와 통근 시간을 줄이는 게 중요했다. 그게 서울에 사는 이유였다.
그리고 현재의 남편을 만나 집을 합치면서 일 년 정도 더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2022년 2월까지. 스무 살이 된 해에서 서른두 살이 된 해까지, 만 11년 동안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이 결혼 전 혼자 살던 집으로 합치게 되었는데, 그곳 역시 역세권이었다. 사당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으로 통근하기에도 알맞은 위치였다. 집 문을 열고 나가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편도 거리 약 4.1Km. 대중교통으로 30분, 전기자전거로는 20분이 걸렸고, 때로 걸어서도 다녔는데 걸으면 60분이 걸렸다. 나는 그런 쾌적한 통근 환경을 아주 소중히 여겼다. 안 그래도 평균보다 작은 내 몸을 구겨서 타도 숨을 쉬기 힘든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늘 급히 출발하고 급히 멈추는 멀미 유발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늘 감사해하며 출퇴근을 했다.
그렇지만 그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남편이 혼자 살던 집은 혼자 살기엔 넉넉했지만 둘이 살기엔 좁았다. 열 평 정도 되는 투룸이었다. 침실로 쓸 수 있는 큰 방과 옷 방으로 쓰기에도 다소 작지만 결국 옷 방이 될 수밖에 없는 방이 있었고, 그 두 방 사이에 거실 겸 부엌으로 쓰는 공간이 있었다. 거실 겸 부엌은 냉장고와 싱크대, 작은 렌지대와 2인용 식탁을 두면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다닐 수 있는 정도의 여유공간이 남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큰 방에는 책상을 놓고 침대를 두고 그 사이에 의자를 두었는데, 한 명이 의자에 앉으면 다른 사람이 지나갈 때 의자를 아주 바짝 당겨 앉아야만 그 사람이 지나갈 공간이 나왔다. 베란다가 없어서 빨래는 작은 방에 널어야 했는데, 펼쳐둔 건조대 옆을 매번 비집고 들어가 행거에서 입을 옷을 찾거나 옷장 서랍을 여는 게 여간 번거로웠다. 볕도 잘 들지 않아서 방 한쪽 벽 구석에서는 자꾸만 곰팡이가 올라왔다. 화장실에 사는 곰팡이들과의 싸움에서는 져버린 지 오래였다. 전문가를 불러 청소를 했지만 곰팡이는 이미 오래 전 부터 그곳의 주인이었다.
소파와 TV를 두고 쉴 수 있는 거실 정도는 없더라도, 최소한 건조대를 펼쳐둬도 상관없는 베란다가 있는, 아님 샤워 칸과 세면대가 분리되어있는 조금이라도 쾌적한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최대 전세가 3억을 생각하고 둘이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 정도면 그래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에 3억으로는 딱히 더 나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동네 부동산에서는 두 사람이 살만한 투룸 빌라를 구하려면 최소 4억은 돼야 한다고 했다. 아니면 허물어져가는 오래된 빌라였다. 서울에서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게 그때였다. 10년 전에는 월세 50만 원 밑으로는 결로가 생기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집만 보여주던 곳, 5년 전에는 전세 1억으로 원룸을 구한다고 할 때 코웃음을 치던 곳, 지금은 전세 3억으로 투룸을 구한다고 또 택도 없다며 코웃음을 치던 곳. 서울에서 집을 구하려고 할 때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에 비해 내가 가진 돈이 너무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서울이기 때문에 그랬다. 집을 사려는 것도 아니고 빌리려고 했을 뿐인데, 그저 둘이 살기에 아주 넓지도 좁지도 않은 집을 원했을 뿐인데, 그런 ‘평범한’ 집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이 지역에선 모든 집들에 과도한 값이 매겨져 있었다.
대학을 따라 직장을 따라 어떻게든 서울에 올라와서 꾸역꾸역 10년 넘게 열심히 살아왔건만 서울은 내게 '넌 여기와 맞지 않아'라고 늘 밀어내고만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모아 살다 보면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집에 갈 수 있겠지, 그런 희망은 버려진 지 오래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몇년 사이에 월세를 5-60만원씩 내며 평범한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꾸준히 한다고 해서, 혹은 전세자금대출을 받고 적금을 붇는다고 해서 몇 억이 뚝딱 생기는 것도 아닌데, 집값은 매번 몇천 몇억씩 뚝딱뚝딱 올라있곤 했다. 집을 깔고 앉은 자들에게 몇 년 사이에 몇 억씩 뚝딱뚝딱 생기는 건 당연한 소리였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 것이어야했을 잠재 소득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에 비해 깔고 앉은 집이 없는 나는 가진 돈에 맞춰 더 변두리로 가거나 더 좁은 집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두 사람이 합친 주거 환경은 혼자 살 때에 비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갑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서울에 산다는 것 자체가 지옥철을 타려고 하는 느낌과도 같았다. 더 이상 탈 수 없는 공간이 없어 보이는 열차 속으로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을 밀며 자기 몸을 욱여넣어가며 이미 빽빽한 그곳에 들어가 스스로 옴짝달싹 할 수 없어지는 느낌. 전 재산의 범위를 초과하여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내놓아도, 심지어 두 사람이 가진 것을 합치고, 또 갖지도 못했지만 미래에 건강하리라는 점을 담보하여 갚을 수 있는 정도의 빚을 져봐도 편히 지낼 공간 하나 마련할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서울이라는 열차는 이미 내가 탈 수 없는 열차였다. 그 열차의 창을 잡고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내 생활에 멀미가 났다. 나는 그렇게 서울이라는 열차를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