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의 이별 이후(2022.2~)
지금 나는 서울이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시골도 아닌, 그렇다고 수도권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경기도 남부의 신도시, 동탄에 살고 있다. 동탄에 오고 나서 우연히 뮤지컬 빨래를 보게 되었다. 빨래의 시그니처 넘버인 “서울살이 몇 핸가요?”라는 노래를 듣자마자 바로 얼마 전까지의 내 얘기 같았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마음에 담고 살아가나요
(중략)
서울살이 육 년, 일곱 번째 이사
낡은 책상, 삐걱이는 의자
보지 않는 소설책, 지나간 잡지
고물 라디오, 기억이 가물가물한 편지
그런 것들은 버리고 와요
버리고 버려도 세간살이, 집세,
내 나이 늘어가지만
내가 만날 사람도 함께 늘어 갑니다”
- 서울살이 몇 핸가요, 노래 가사 중에서
‘서울살이 몇 핸가요?’라고 묻는 가사에 내 얘기를 대입해보았다. 서울살이 십이 년, 여덟 번째 이사. (기숙사에 살던 2년 동안은 한 학기마다 이사했지만 그것까지 더하면, 정확히 헤아리기 힘들뿐더러 대략 열몇 번째 이사가 된다. 기숙사 2년은 퉁쳐서 한 번으로 보면 서울 안에서 마지막 이사까지 여덟 번이다.) 혼자 사는 동안 늘어난 세간살이들, 조립식 가구들, 다이소 그릇과 컵, 생활용품들. 전공책, 논문 쓰느라 인쇄한 종이 쪼가리들, 시험공부하느라 샀던 문제집들, 작은 집에서나마 꾸며보고 싶어서 샀던 작은 피규어들, 인형, 장식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취향이 바뀌어서 버리고 새로 사고 또 버리곤 했던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옷들과 가방, 신발들.
이사를 거듭할 동안 멀쩡한 것들은 누군가에게 그냥 주기도 하고, 중고 서점에 책을 팔면서 현금으로 바꾸기도 했고, 버리기에는 아깝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부모님 집에 가져다 두었다. 그런데도 나는 늘 짐 더미로 가득 찬 방에서 겨우 겨우 발 뻗고 잘 공간을 만들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산다는 건 짐을 계속해서 늘려가는 일 같았다. 패션에 그리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옷과 신발, 가방은 매년 늘어나고 원룸 속 작은 옷장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차고 넘쳐서 옷을 본가에 보내고 가져오곤 해야 했다. 이사할 때마다 도와주러 오신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뭘 이렇게 얄궂은 걸 많이 샀냐”
억울했다. 살기 위해 사야 하는 필요한 것들만 샀다고 생각했는데, 이 좁은 곳에 사느라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참고 사는데, 작은 원룸에 아무리 욱여넣어도 정리가 되질 않아서 짐이 더 많아 보이는 것뿐인데, 꼭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라도 부린다는 말 같아서. 물론 스스로도 딱히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짐들을 발견할 때면 할 말이 없어지곤 했지만, 그래 봤자 그런 것들은 만원도 되지 않는 작은 장식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나는 필요하다고 항변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꾸밀 수 없는 이곳에서 나답게 살기 위한 아주 작은 방편일 뿐이었다고.
동탄에 이사를 오면서 처음으로 내 물건이 많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넓은 집도 아니었지만 둘이 살기에는 그래도 꽤 넉넉한 집이어서 사서 채워 넣어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역시나 내 물건이 많은 게 아니었다. 부모님도 처음으로 내 짐을 두고 많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세상만사 많고 적음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었다. 이삿짐을 옮겨주시던 분들도 ‘이 방은 텅텅 비었네요.’ 했다. 나는 ‘네, 앞으로 채워야죠’ 하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채워야 한다니!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TV를 샀고, 처음으로 소파를 샀고, 거실 테이블을 샀고, 꽤 많이 고심해서 식탁과 식탁의자를 샀다. 처음으로 방 한 칸에 딸린 옵션 옷장이 아니라 조립식 행거도 아니라 직접 고른 가구인 옷장을 샀다. 처음으로 침대도 샀다. 그렇게 물건을 많이 사도 물건들로 넘쳐나는 느낌이 아니었다. 물건에 깔릴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가구와 물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기능을 하며 안락함을 주었다. 그렇게 거실과 침실 옷방 부엌 화장실 다용도실 공간이 구분되자 드디어 자연스레 ‘우리 집’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혼자 사는 거처를 ‘내 방’이라고 불렀다.
서울에 살면서 쌓을 수 있었던 좋은 추억도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추억들은 사실 내 방이 아닌 곳에 있었다. 나는 대체로 좁은 내 방을 탈출하고 싶어 했다. 내 방에서 잠을 잘 자기 위해 내 방 바깥에서 하는 일들이 더 많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 방을 넘어 서울을 탈출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서울에 사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면서 원룸을 구하러 다닐 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언제라도 스스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서울이라는 지옥철에 탑승해있는 동안 그 차창밖으로 허용된 네모칸 안의 좁은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 풍경 밖으로 보이는 ‘빛나는 한강’에만 취해있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카페에서 취식이 불가능해지고, 좁은 ‘내 방’ 안에서 재택근무를 해야 했고, 운동 센터에 가는 것도 금지되고, 한강변을 달릴 때마저 마스크를 써야 하는 기간을 거치면서, 탈출에 대한 욕구는 극에 달했다. 서울이 아니어도 되는 ‘비대면’, ‘거리두기’의 시대인데 여전히 서울의 집값은 도무지 내가 붙잡고 있지 못할 만큼 오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제야 다른 것들이 보였다. 내 모든 힘듦과 버거움이 사실은 모든 게 밀집된 이 도시, 서울에서 왔다는 걸.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 도시, 서울에 가지 않으면 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았고, 그곳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 도시가 제공하는 하찮은 집과 하찮은 직장을 걷어차버린다면 더 괜찮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마음도 십몇년에 걸쳐 서울이 나에게 키워준 맷집 인지도 모르겠다.
서울을 떠난 지 8개월이 되었고 봄, 여름, 가을이 한 번씩 거쳐갔다. 나는 직장인에서 자영업자가 되었고, 법적으로 기혼자가 되었고, 대중교통과 따릉이를 주로 이용했던 뚜벅이는 쏘카 이용자를 거쳐 이제 주로 자가용을 이용하게 되었다. 주말이면 지하철을 타고 서울 어디로든 가곤 하며 만족했던 나는 이제 주말이면 차를 타고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다. 서울을 떠나고 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 꿈만 꾸었던 일을 해보는 도전. 여유로운 공간과 더 커진 기동성. 잃은 것이 있다면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의 더 잦은 만남, 적지만 그래도 안정적으로 공급받던 월급 정도다. 잃은 것도 적지 않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얻은 것들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서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가득 찬 도시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토록 가득 찬 도시보다는 나에게 조금 더 쉽게 많은 것들을 내어줄 수 있는 여유로운 도시가 잘 맞는다는 걸 서울살이 여러 해만에 서울을 떠나서 알게 되었다.
살아가기에 버거웠지만, 그랬기에 내게 맷집을 키워준 서울이여, 한 때는 동경했고, 사랑했고, 지겨웠고, 지긋지긋했고, 덕분에 괴로웠고, 떠날 때는 조금 아쉽기도 했어. 다시 만날 때는 우리 서로 낯선 얼굴로 만나자. 여행자의 시선에서, 곧 떠날 사람으로,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산뜻하게 갈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