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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Apr 07. 2023

늘 새롭고 짜릿한 커피 한 잔

커피 취향의 역사

당연한 루틴처럼 매일 아침,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어쩌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날이면 하루 종일 졸린 느낌이 든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다. 믹스커피로 시작한 취향은 곧 카페에서 파는 온갖 종류의 커피로 옮아갔다.


처음에, 커피는 나에게 일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방학 때, 보충 수업을 한두 시간씩 자주 빠지곤 했다. 출결 체크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선생님 시간에만 두세 시간씩 ‘시내’ 혹은 학교 근처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몇 시간씩 수다를 떨기도 하고, 문학소녀처럼 책을 읽기도 했다. 학교 수업을 자주 빠졌던 이유는 야간 자율 학습이나 보충 수업이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그 어떤 여가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나름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심했기에 선생님과 부모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한 방식으로 반항했던 것이다. 함께 땡땡이 칠 친구가 없을 때는 혼자라도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곤 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도, <소유냐 존재냐> 도, <인간 소외> 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도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을 팽개치고 읽었던 책들이다. 심리학과에 가고 싶었으니 대학교에서 배울 걸 미리 예습하는 것이라 멋대로 생각했다. 샤르트르의 <구토>를 읽으면서는 이해하지 못해서 토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머리에 욱여넣어보고 싶어 했다. 커피로 뇌를 깨우면 어떻게든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대학교 내에 있는 부설 고등학교여서 학교 근처에 커피 값이 저렴한 카페가 많았다. 아메리카노는 천 원, 카페라테는 천오백 원, 캐러멜 마끼아또는 이천 원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십수 년 전이라고 감안해도 싼값이다. 테이크아웃 종이컵의 1/3 가량이 훤히 보일만큼 양은 좀 적었는데, 커피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덕분에 저렴한 값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라테 맛을 알게 되었다. 그전에 믹스 커피만 마셔봤던 내게 라테는 신세계였다. 달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묵직하고 고소한 우유가 향긋하고 진한 커피 향과 어우러져 뜨끈하게 몸을 덥힌다. 라테를 매일 밥 대신 먹다시피 했다. 고등학생이 읽을 것 같지 않은 세계 고전 문학이나 철학 책, 심리학 책을 한 권씩 들고 카페에서 책을 읽는, 입시에 목메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나 자신에 취해서. 어쨌든 그 때부터 꾸준히 커피와 함께 형성한 취향은 실제로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함께 전공한 내게 꽤 도움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카페 모카가 나의 아침 식사였다. 당시에 나는 최소한의 것을 먹으며 살아가는 병약한 지식인이고 싶었던 것같다. 휘핑이 잔뜩 올라가고 초코 파우더나 시럽을 아낌없이 섞은 극한의 단맛을 지닌 고칼로리 고카페인 음료. 오전 9시나 10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할 때면 강의실 건물 1층의 교내 카페에서 3천 원짜리 카페 모카를 주문해서 먹었다. 찐한 단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휘핑크림을 빨대로 조금씩 퍼올려 먹다 보면 포만감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 시험기간 중 한 번은 그렇게 아침마다 빈 속에  휘핑크림과 우유와 초코 시럽이 잔뜩 들어간 당 덩어리 커피를 먹다가 탈이 난 적이 있다. 갑자기 창자가 꼬인 듯이 배가 미친 듯이 아파서 식은땀을 흘리며 교내 양호실에 갔더니 양호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오늘 하루 종일 뭐 드셨어요? “

양호실에 갔던 시간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서너 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카페모카 한 잔만 먹었어요. “

양호 선생님은 우리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천사’로 불릴 정도로 무척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야죠. 빈 속에 커피만 마시면 안 돼요. “

걱정스러운 말투로, 아주 기본적인 당연한 이야기를 해주신 것이지만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란’ 그 말씀이 마음에 깊게 콕 박혔다. 당시 기숙사에 살고 있던 내게 ‘밥을 잘 챙겨먹으라’ 걱정을 해주는 어른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자상한 말씀이 더욱 와닿았다. 내가 아침을 대충 때우고, 특히나 빈 속에 유당과 지방과 당 덩어리만 가득한 카페모카를 때려 붓는 건(카페모카는 죄가 없지만, 공복에 먹는 행위는 죄다. 그러니 절대 따라하지 마시라…)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었구나, 그 짧은 말씀으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배가 정말 아팠었기 때문에 아침 공복에는 그 후, 절대 카페 모카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라테나 모카를 끊고 아메리카노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건, 신맛 나는 원두를 맛본 후부터였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갔던 카페에서 메뉴판에 원두의 종류를 골라 드립커피나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커피에 대한 설명에서 ‘꽃 향기, 과일 향기’라는 문구를 발견했고, 커피에서 꽃 향이나 과일 향이 난다는 게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주문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 원두가 ‘예가체프’ 원두였던 걸로 기억한다. 마시자마자 진정한 내 취향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모르고 있었던 맛과 향의 세계가 내게 훅 흘러들어왔다. 그때부터 아메리카노를 주로 마시게 되었다. 신 아메리카노는 아침에도 점심에도, 내게 산뜻한 기분을 선물해 주었다. 커피는 내게 기분 좋은 향을 내뿜는 향수이자 그 자체로 디저트가 되었다.


작년부터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다. 운전할 때 텀블러에 담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콘솔 박스에 두고, 조금씩 홀짝홀짝 마시는 그 맛.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조수석에 함께 앉아있다. 어디론가 향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커피의 향을 극대화시켜주는 듯하다. 때때로 창문을 활짝 열어 가라앉았던 차 안 공기를 시원하게 환기시키고 나면 커피 한 모금이 새삼 새로이 느껴진다. 이뇨작용을 촉진하는 커피 때문에 한 시간에 한 번씩 꼭 휴게소에 들러야 하지만 운전하면서 마시는 커피를 포기하지 못한다.


직접 서점을 운영하면서부터는 카페에 잘 가지 않게 되었다. 특히 아무리 커피가 마시고 싶어도 선택지도 없이 테이크아웃잔에 주는 곳이나 텀블러 없이 일회용 잔을 써야 하는 상황이면 가지 않는다. 서점에 출근해서 직접 기계를 작동시켜 에스프레소를 뽑고, 아메리카노를 만들거나 라테를 만드는 그 과정이 무척 좋다. (보통의 카페의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은 아니고 작은 자동 머신이다.) 직접 만들 때, 나는 나에게 커피를 판다고 생각한다. 취향껏, 라테는 이제 우유가 아닌 오트유로만 만들어먹는다. 아메리카노는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진하게 혹은 연하게, 날씨에 따라 따뜻하게 혹은 시원하게 만든다. 매일매일 내가 좋아하는 컵, 스탠리 스테인리스 잔에 마시는 것이 좋다. 깨질 걱정이 없고, 보온과 보냉이 잘되는 잔이라서 좋아한다. 캠핑 용품으로 나온 컵이기도 해서 캠핑하는 느낌도 낼 수 있다. 당연하다는 듯 매일 한 잔 혹은 두 잔씩, 때로는 세 잔씩 마시기도 하지만 세상에 같은 커피는 없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컵에 같은 원두로 먹더라도 함께 하는 음악과 책에 따라 커피는 더욱 쓰기도, 향기롭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커피로 하루를 시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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