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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Jan 25. 2024

엄마는 흥정의 달인

띵동- 이사 견적 내러 왔습니다

이사를 한 달 앞두고, 이사 견적을 받기로 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2시 30분. 남편은 출근하고 나 혼자 집에 있을 시간인데, 엄마가 견적 볼 때 본인이 있어야 한다며 (이유는 곧 알게 됩니다) 미리 와서 같이 있겠다고 하셨다.


약속 시간 10분 전, 엄마는 사과와 병어조림, 몇 가지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에 오셨다. 난 주부 2년 차이지만 아직까지 생선 요리는 대부분 엄마 찬스를 쓰고 있다. 손질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귀찮기 때문이다...라고 쓰자니 창피하구먼. 대신 손질된 고등어와 갈치는 종종 사서 구워 먹는다. ('손질된'이 포인트)


반찬을 얻어먹을 땐 리액션을 잘 해줘야 한다. 맛있겠다고 물개 박수를 치며 반찬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삿짐을 나르게 될 남자분들이 견적 보러 오시는 줄 알았는데, 5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오셨다. (이하 실장님)


"안녕하세요~~ 견적 보러 왔습니다^^"


표정이 밝은 분이셨다. 실장님은 빵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셔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셨다.


"와 짐이 정말 별로 없네요?"


"그렇다니까요. 짐이 별로 없어요."

엄마가 맞장구쳤다.                                                                                                                    


우리 집은 작은 투룸으로, 물건이 없는 편이다. 풀옵션 오피스텔이라 웬만한 가전은 내장되어 있고, 나와 남편이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해 필요 없는 가구는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파도 두고 가기로 해서 이사 갈 때 가져갈 큰 짐이라고는 고작


1) 침대

2) 2인용 (높이 조절) 책상

이렇게 2개뿐이고,


중간 사이즈 짐은


1) 3단 책장

2) 이케아 6단 서랍장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높이)

3) TV와 거치대


이렇게 3개가 끝이다. 실장님은 좁은 공간을 여기저기 다니며 꼼꼼하게 살펴보시고는


"와 이렇게도 살림이 되는구나. 요새 보통 신혼집도 짐이 많거든요. 이 집은 정말 없네."


라며 신기해하셨다. 다 둘러보신 후에는 우리 집 주방에 딸린 작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가방에서 견적서를 꺼내 이것저것 체크하셨다. 엄마는 맞은편에 앉고, 나는 얼른 견적 내주시길 기다리며 그 옆에 문지방에 서 있었다.


이 이삿짐 업체는 내가 알아본 곳은 아니고, 엄마가 예전에 이사 갈 때 이용했던 곳이다. 그때 좋았다고 하셔서 여러 업체를 알아보지 않고 그냥 이곳으로 정했다.


엄마는 실장님께 전에도 계셨냐며 낯이 익다고 말문을 여셨다. 실장님도 역시 엄마를 뵌 적이 있는 것 같다며 맞장구치셨고, 그렇게 두 분의 짧은 수다 타임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일 한지는 얼마나 되었고, 요즘 신혼부부들 집은 이렇고 저렇고,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못 갔고 등등 소소한 (그리고 꼭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하며 십여분이 흘러갔다.


나는 옆에서 '아~', '흐흣' 등의 소심한 추임새를 넣으며 '견적비 내는 게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인가?'라는 의문을 품은 채 멀뚱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왜 그런 대화가 필요했었는지.


"으음.. 견적비를 어떻게 내드려야 되나."


실장님은 괜히 수다를 떠신 게 아니었다. 엄마와 대화를 하면서 견적비에 대한 계산을 머릿속으로 하고 계셨던 거였다. 받아야 하는 비용이 있는데, 우리 집이 생각보다 짐이 없는 데다가 엄마가 기존 고객이니 금액을 정하기가 어려우셨던 거다. 실장님은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펜 끝으로 테이블을 몇 번 톡톡 치시고는 힘겹게 입을 여셨다.


"견적비가... 8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요."


"네?? 어머, 너무 비싸요. 말도 안 돼요."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엄마가 나에게 말해준 대략적인 예상 견적은 60만 원 정도였기 때문에, 나 역시도 깜짝 놀랐다. 20만 원 추가 지출은 오바지. 엄마 파이팅.


"그러니까요. 그래서 말씀을 못 드린 거예요. 그래도 80만 원은 주셔야 돼요."


"너무 비싸요. 짐이 이렇게 없는데요??"


"짐은 진짜 없긴 해요.. 진짜 없어요. 음..."


"80만 원은 너무 비싸고요. 65만 원에 해주세요^^ 이거 30분이면 짐 다 나갈 텐데!"


오, 엄마의 딜이 시작되었다. 65만 원. 나는 숨 죽이고 지켜보았다.


"어우, 65만 원 안 돼요! 시간당이 아니고 인건비로 나가는 거라서요. 금요일이 제일 비싼 요일이에요. 다른 요일이면 좀 더 싸게 해드릴 수 있는데."


"날짜를 지금 어떻게 바꿔요. 다른 곳에서는 주말에 제일 비싸다고 하던데 말이 다 다르네."


"업체마다 다를 수 있어요. 그럼 5만 원 빼서 75만 원에 해드릴게요."


사실 75만 원도 비싸다. 내가 아는 지인은 방 3개에 짐이 엄청 많은데 120만 원 주고 옮겼단 말이지. 여긴 2명이 와서 30분이면 다 나갈 짐인데. 다른 업체에도 견적을 내봐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되었다. 엄마 역시 물러서지 않으셨다.


"에이~~ 75만 원도 비싸요. 그리고 포장이사도 아니고 저희가 미리 다 싸놓을 건데요."


"안 돼요 사모님. 짐은 저희가 싸도 돼요. 그건 크게 상관없어요. 이사 가는 집까지 이동시간이 또 한 시간 반은 걸릴 거고요." (아닙니다 1시간도 안 걸립니다만...)


팽팽하다 팽팽해. 나는 옆에서 조신하게 서있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 흥미진진한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저 저번에도 여기서 했잖아요. 65만 원에 해주세요."


엄마는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띤 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65만 원은 승인이 안 날 텐데.. 음, 그럼 70만 원에 해드릴게요."


오호라, 70만 원이면 억지로 합의할 만 한데. 나였으면 여기에서 합의 봤다. 하지만 딸 지갑을 사수하려는 엄마의 의지는 대단했다.


"그럼 65만 원에서 2만 원 더해서, 67만 원에 해주세요^^ 여기 계약금 5만 원 드릴게요."


엄마는 실장님 쪽으로 5만 원을 쑥 밀어 넣었다.


"안 돼요 안 돼. 70만 원에 해요. 금요일이라 그래요."


"에이, 그럼 다른 업체도 알아봐야 해요. 비싸네요."


엄마의 최후 통첩. 하긴, 다른 곳에서도 견적 받으면 되니 우리가 아쉬울 건 없다.


"아이참, 안 되는데. 그럼 일단 67만 원으로 하고 어떻게 되는지 볼게요. 승인되는지."


그렇게 숨 막히는 흥정 끝에 계약서엔 67만 원이란 숫자가 적혔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다른 연락은 없다. 실장님이 (다행히) 웃으며 인사하고 떠나신 뒤, 나는 엄마에게 엄지를 추켜올렸다.


"와, 대단하다. 나였으면 70만 원에서 끝났다."


"너무 비싸. 너 나갈 돈도 많잖아. 엄마가 5만 원 냈으니 너는 62만 원만 내."


네 엄마. 아니, 어머니.


사실 나는 뭐든지 제값을 주고받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가격 흥정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당한 가격이다 싶으면 그냥 내는 편. 엄마 역시 필요할 때만 한두 번 물어보실 뿐 그 이상으로 깎지는 않는 분이다.


하지만 이번엔 이삿짐 대비 금액이 과하게 높았고, 내가 내는 돈이다 보니 엄마가 특별히 마음을 단단히 먹으셨던 것 같다. 덕분에 다행히 예산과 비슷한 가격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업체를 알아보면 더 저렴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알아보기도 번거롭고 실장님도 고생하셨으니 그냥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좋아, 한 가지 또 해결했다!




오늘 나 혼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어버버버'하다가 75만 원 정도로 협의하고 끝났겠지. 엄마가 왜 오늘 꼭 본인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가 견적비를 흥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묘하게도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날 위해 비용을 깎아서가 아니라, 뭐랄까, 자진해서 나의 방패가 되어준 느낌이 들어서랄까. 분명 엄마도 민망했을 텐데, 초연하게 끝까지 버티는(?) 모습에서 '엄마라는 존재의 강인함'을 느꼈다.


엄마가 나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너의 수호천사잖아."


수호천사 맞다. 고마워, 엄마. 아낀 돈으로 맛있는 거 사드릴게!


#이번 주 명장면: 나의 방패가 되어 내 지갑을 지켜준 엄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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