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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Apr 11. 2024

우리 집에 온 맥가이버 아저씨

오늘은 아침부터 바빴다. 드레스룸 도배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저번 주에 화장실 방수 공사를 했는데, 그때 작업했던 분(이하 사장님)이 우리 집 침대방에 딸려있는 작은 드레스룸 벽면 안쪽에 곰팡이가 있다며 새 도배를 하라고 제안하셨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라 임대인이 해줄까 싶었는데 천사 같은 우리의 임대인은 흔쾌히 허락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반나절을 작업해야 하는 일정이라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평소처럼 새벽 5시 15분에 일어나서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책을 읽고, 남편이 나간 후에 40분 동안 요가를 하고 잽싸게 씻었다. (쓰고 보니 안 서두른 것 같네;;) 남은 시간 동안 침대방에 있는 물건들을 거실로 다 빼놨다. 협탁, 청소기, 이불과 베개 등등. 옷은 어제 미리 빼서 거실 빨랫대 위에 층층이 쌓아놓았다.


이윽고 사장님과 다른 한 분이 오셔서 작업을 시작하셨다. 낯선 사람들이 집에 있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두 분과 나름 친해져서(?) 종종 수다 떠는 재미가 있었다. 저번 방수 작업날부터 이야기꽃을 피우며 사장님에 대해 알게 된 정보 몇 가지.


-딸이 남자를 꽉 잡는 스타일인데 곧 결혼함

-딸이 맥시멀리스트

-전유진 트로트 가수 좋아하심 (그래서 지난주에 유튜브로 전유진 모음곡을 틀어드렸다)

-돈을 많이 버심

-일을 엄청 많이 하심

-못 하는 게 없으심 (자칭 맥가이버. 일 진짜 잘하셔서 인정!)

-영업을 잘하심

-예의 없는 사람을 싫어하심


아, 웃겨. 얼마 전까지 전혀 몰랐던 분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주에 돈에 대해 얘기하실 때는 좀 놀랐다. 한 달에 못 해도 월 천만 원은 버신다고 한다.


"헥, 진짜요? 와, 많이 버신다. 근데 일이 힘드니까 당연히 많이 벌어야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많이 일해서 그래. 오늘도 4건이나 있어."


"와~~ 그렇게 열심히 하시면 많이 버셔야죠."


작업하시는 거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많이 버셔야 한다. 돈을 준대도 나는 못하겠는 일을 해주시니까. 절대 손대고 싶지 않은 부분을 맨손으로 고쳐주시니까.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무릎 꿇고 허리 구부려 일하시니까. 마무리는 또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많이 버셨으면 좋겠다.


드레스룸 도배 준비 완료! 도배는 다른 분이 와서 해주셨다


작업이 많이 진행됐을 무렵, 사장님이 거실을 지나가다 갑자기 멈춰 서서 말씀하셨다.


"인덕션이 저게 뭐야?"


기억하시는 독자분이 있으려나. 예전에 <이사 온 집 '옥에 티'를 해결하다> 글에 썼던 인덕션 말이다. 스탠딩케이스를 세웠더니 너무 갑툭튀가 되어, 시트지를 붙여 겨우 봐줄 만하게 만들었던 그 인덕션!



https://brunch.co.kr/@ohpro7/36


사장님은 주방 상판에서 툭 튀어나온 인덕션이 영 마음에 안 드셨던지 요리조리 움직여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이거 그냥 안에 매립해도 되는 건데 이걸 왜 보기 싫게 세웠어?"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밑에 타공(구멍) 깊이가 얕아서 매립할 수 있는 인덕션이 없었어요."


"밑에 닿는 나무판을 깎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일이 커진다던데요? 돈도 많이 들고."


"아, 그거야 그 사람이 못하니까 하는 소리고. 쉽게 하는 건데."


"진짜요? 아, 잘못 알아봤네. 그럼 매립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나 맥가이버야. 오만 원에 해줄게. 언니가 예뻐서 해주는 거야."


헐, 전에 인덕션 설치해 주셨던 분은 30만 원 불렀던 건데. 트로트 틀어주고 오렌지 썰어주고 말동무해드린 보람이!!! 사장님은 주방을 전부 비닐로 막고 인덕션 타공 안쪽에 있는 나무판을 드릴로 잘라내셨다. 뽀얀 연기와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심 맥가이버인 줄.


타공 가운데에 보이는 나무판을 잘라내야 인덕션을 넣을 수 있다


이거지~~ 이거야~~~


그렇게 나는 단돈 오만 원에 다시 매립형 인덕션을 갖게 되었다. 해결하려고 그렇게 머리 굴릴 때는 답이 안 나오더니, 이렇게 갑자기 해결될 줄이야. 다시 넓어진 나의 주방, 너무 마음에 들어!


몇 시간 후, 두 분은 마무리 작업을 하고 내가 준비한 편의점 커피를 하나씩 골라 유유히 퇴장하셨다. 이로써 화장실 방수 작업과 드레스룸 도배 작업까지 큰일 두 개를 해결했다. 아, 속 시원해.


손바닥에 땀나게 밀대로 바닥을 밀며 청소하고 있는데 남편이 카톡으로 야구장에서 먹고 있는 피자 사진을 보낸다. 살짝 킹받지만 난 지금 집에 있는 게 더 좋아...(원래 나도 야구장에 가기로 했다가 도배 끝나고 피곤할 것 같아 취소했는데 신의 한 수였음)


피곤이 밀려오지만 인상깊었던 오늘을 후다닥 기록해본다. 맥가이버 아저씨 덕분에 재밌는 하루였다. 내일도 알차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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