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여보, 이 아보카도 좀 봐. 색깔이 어쩜 이래?"
"여보, 이 복숭아 향 좀 맡아봐. 너무 좋지 않아?"
갈수록 엄마와 똑 닮아간다. 정말 희한하다. 엄마가 늘 그랬다. 여름이면 특히 자두와 천도복숭아를 좋아했는데, 시큼털털한 그것들을 엄마는 여름마다 기다려 먹었다. 매냥 밥 먹기 전이나 후에는 걔네들을 알알이 씻은 뒤, 한 손으로는 자기가 한입 베어 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에게 한 알을 건네주며 너무 맛있지 않냐며 유난스러워했다. 그때는 시큼털털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여름만 되면 마트에 간 내가 그렇게 자두며 복숭아며 주워 담는다. “여보, 이 천도복숭아 좀 먹어봐. 어쩜 이래?”
어릴 땐 아빠 판박이였다. 얼마나 판박이였냐면, 초등학교 친구들은 운동회며 졸업식이며 하는 행사들로 가족들이 학교에 왔을 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대번에 “미연이 저기 있어요.”하고 아빠를 안내했다. 중학교 친구들은 “네가 머리만 밀면 너네 아빠다.” 했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그냥 “말해서 뭐하냐.”라는 식이었다. 내가 봐도 징그럽게 닮았다. 엄마는 가끔 나를 보고 신경질을 냈다. “지 아빠랑 똑같이 생겨가지고.”
지금은 아빠 모습이 많이 흐릿해졌다. 물론 발가락은 여전히 아빠와 너무 똑같아서 종종 한참을 들여다보지만. 그런데 발가락을 빼고는 많은 부분들이 엄마처럼 변하고 있다. 가끔씩 거울을 보며 나도 놀랄 만큼 어느덧 엄마 얼굴이 많이 드리워졌다. 체형도 엄마를 닮은 편인데, 얼굴까지 점점 더 비슷해져 가니 내가 봐도 한눈에 엄마 딸이다. 말투는 또 어떻고. 습관은 또 왜 닮느냔 말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더우면 잠을 못 잔다. 이런 체질도 엄마와 비슷한데, 더울 때 화들짝 깨 일어나며 "아우 더워!"하며 짜증스러워 하는 말투까지 따다 붙였다. 잠결에 내가 뱉어놓고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 또 엄마는 밥을 먹고 나면 '까악 끄윽' 하며 딸꾹질을 자주 하는데, 우리 식구 아무도 안 하는 그걸 나만 한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대학 시절, 나는 그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다. 특히 클로드 모네를 좋아했고, 지금도 동경한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풍경을, 그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좋다. 특히 <루앙 성당> 연작을 흠모해 왔는데, 맑은 날에도 습기 가득한 날에도, 이른 아침에도 땅거미 질 녘에도, 한 공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모네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림을 보는 것보다 그 화가를 상상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모네처럼 보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나도 사물을 저렇게, 매일 다르게 낯설게 봐야지 했었다. 이처럼 나는 작품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냈을 작가의 눈과 손을, 그의 생각을, 짐작하고 미루어보는 것에서 더욱 감동을 받는 편이다.
그런 연유로, 엄마의 시를 읽는 것보다 엄마를 상상하는 것에 더 마음을 쓴다. 엄마의 시를 보면, 엄마의 시선이 느껴진다. 바쁜 일상에 튀밥처럼 튀어가는 사람들, 정수리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그 태양에 팔딱이는 도로, 엄마의 엄마를 바라보는 내 어린 엄마와, 어린 엄마를 바라보는 나이 든 엄마. 모네는 같은 대상을 늘 낯설게 다시 봤지만, 엄마는 낯선 대상을 단숨에 익숙한 경험으로 매만진다. 매우 본능적이고 날 것 같은 표현이라서 단번에 살아 있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래서 엄마의 시가 좋다. 엄마의 행간을 읽으면, 언젠가 봤던 풍경 같고 언젠가 보게 될 장면 같다. 시 속에서 엄마의 과녁을 따라 버스를 타고, 창 밖의 사람들을 보고, 그 날의 소리를 듣는다. 그 안에서 엄마의 열정, 엄마의 서글픔, 그리고 나의 시간, 나의 안간힘 등을 떠올린다. 아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엄마를 닮아가는 동안에.
많은 자식들이 나는 부모처럼은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곤 하는데, 언젠가 돌이켜 보면 그들처럼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익숙한 대로 좇는 것이 쉽고 안전하리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습득했기 때문일까. 딸은 엄마처럼 늙고, 아들은 아빠처럼 살아가게 될까. 나도 한참 동안 '엄마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며 깨닫건대 엄마의 삶도 무척이나 드라마틱했으며 그 누구보다 훨씬 담대하게 진행 중이다. 나도 언젠가는 엄마처럼 시를 짓고 싶다. 잔잔한 눈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읽어내며,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고 싶다.
정오 - 양 현 -
시간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오롯이 부서져 내리기 위한
수직의 정오
물컵처럼 쏟아진 사람들
파도물결로 정오를 밀고 간다
나무는 정수리를 노랗게 굽고
도로는 고등어처럼 팔딱인다
하늘은 목이 말라 구름을 베어 먹고
부채살같은 햇살이 하늘 위로 펼쳐지면
수직의 정오가 절벽을 뛰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