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갱년기는 처음이잖아요
사춘기(思春期) : 봄을 생각하는 시간
갱년기(更年期) : 삶을 다시 하는 시간
나는 사춘기가 퍽 당황스러웠다.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겪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몸의 변화가 창피했고 알 수 없는 변덕에 혼란스러웠다. 그 또한 지나갔지만, 한 철을 통째로 뒤흔든 찐한 성장통이었다. 뭐든 처음이라는 것은 아득하고 두려운 것일 테다. 그리고 지금 엄마는 처음으로, 사춘기만큼이나 낯선 갱년기의 시간을 건너고 있다.
엄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난다, 는 말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었다. 그다지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한 적이 없고, 딱히 못해준 건 없다고, 비교적 나는 말 잘 듣고 잘 자란 딸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스무 살 때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며 집을 떠나 상경하고 엄마에게 귀 기울이지 못한 십 여 년간, 엄마를 떠올리면 우리 사이에 벌어진 공간과 시간의 거리만큼 마음이 지잉 거렸다. 이제는 제법 삶이라는 것을 나도 살아내며 엄마도 '엄마의 삶'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걸어가고 있는 것임을 어쩌다 자각할수록, 더욱 애잔하고 때로는 동질감 같은 것도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나의 서글픈 존재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모두가 '별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서로가 미안한 대상이 돼 안쓰러워 하기에는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감정의 한계가 애석했다. 그보다는 응원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미안해하거나 울적해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끼리는 '에피소드 제조기'라고 부를 만큼 예능신이 따르는 엄마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쿡쿡 웃고, 소녀 같은 표정 뒤에 감춰진 강렬하고 뜨거운 엄마의 열정 등을 조금 더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최근 내게도 엄마를 떠올리면 무언가 묵직한 것이 쿵 하고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일곤 했다. 엄마의 설거지 소리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쨍, 쨍그랑, 챙, 째앵, 탁, 탁
엄마가 설거지하는 소리가 몇 년 전인가부터 무척 시끄러워졌다. 평소엔 잊고 지내다가도 한두 달에 한 번 친정에 가면 어김없이 이 소리가 나의 감각을 뾰족하게 찔러댔다. 다른 식구들이 설거지를 할 때는 아무런 자각이 없는데, 엄마가 설거지를 하기만 하면 내 신경들이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 "엄마, 왜 이렇게 설거지를 시끄럽게 해? 좀 살살 해 그릇 다 깨지겠어." 사기그릇 부딪치는 파열음들이 내게는 너무도 '들으란 듯이' 들렸다. 꽤나 거슬리는 소리였다. 그런데 평소대로라면 핀잔을 하고도 남았을 아빠가 그때마다는 웬일인지 말없이 텔레비전만 응시했다.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다 비교적 최근의 어느 날, 엄마는 우리 식구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툭 하고 이런 말을 했다.
"너네가 언제 내 갱년기 걱정해준 적 있어?"
정말이지 세차게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듯 지나가려던 일을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민망함과, 미안함이 수차례 교차했다. 끙끙 혼자 앓던 엄마는 우리의 외면에 못 이겨 왈칵 뱉어버린 것이다. 왜 나는 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했을까. 엄마의 설거지 소리가 이토록 다급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갱년기에 접어들면 쉽게 우울해지고 짜증이 나며 매사에 비관적이게 된다고 한다. 익히 알고 있듯 여성호르몬은 줄고 남성호르몬은 증가하게 되는데, 이뿐만 아니라 소위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세로토닌과 아드레날린까지도 감소한다고 한다.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과 마음의 울적함이 동반되는, 몸과 신경계가 완전히 재구성되는 '일대 변혁'이 바로 갱년기인 것이다.
딸이 둘이나 있건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때로는 핑계로 엄마의 갱년기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루하루 엷어지겠지' 했던 시간들 동안 엄마는 하루하루 애쓰고 버티고 참았으리라. 친구가 독박육아에 힘들다고 하면, 엊그제 남자친구와 이별했다고 하면 잰걸음에 달려가 온갖 위로를 쏟아내 주면서도 정작 엄마에게는, 움푹 패인 듯한 상실감과 쓸쓸한 성장통을 겪고 있던 나의 엄마에게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제대로 해 준 적이 없었다. 엄마도 갱년기는 처음인데, 어째서 엄마니까 잘 참아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얼마 전 유튜브 영상에서 갱년기에 관해 몰랐던 내용을 보게 됐다. 갱년기는 호르몬 변화로 인한 고통도 따르지만 한편으로는 사고력과 집중력, 직관력, 통찰력, 창의력 등이 훨씬 더 좋아지는 시기라고 했다. 여성이 아이들을 낳고 길러내는 과업을 마치고 '완경'의 시점을 맞이하게 되면 비로소 이제 자신을 돌볼 차례임을, 새롭게 성장할 때임을 본능적으로 일깨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몸과 마음에 다른 습관과 균형이 필요하다며 몸부림치듯 거세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 즉, 갱년기는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새로운 자극제인 셈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가까스로 참아낼 테고, 일과 취미 또는 운동 등으로 극복할 것이고, 전에 없던 전환점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엄마는 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짐작건대, 비슷한 시기다. 엄마의 설거지 소리가 시끄러워진 것과 엄마가 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엄마는 그랬다. "시를 쓰면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거스를 수 없는 정신과 육체의 시간을 통과하며 온전히 공감받고 위로받지 못했던 엄마는, 시를 쓰며 제 속의 시끄러움을 달래고 외로울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엄마, 미안해. 힘들었지." 어느 날 문득 엄마에게 사과를 했다. 딸이자 여자로서 엄마의 힘든 시기를 애써 모른 체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고마워, 딸아." 엄마는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엄마 나이가 돼서야, 앞으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엄마의 문을 두드려보려고 한다. 힘껏 열어젖히지 못하고 시에 털어놓고 설거지에 화내던 엄마의 마음을 똑똑 두드려볼 생각이다. 엄마로서가 아닌 그녀의 홀로서기를 진심을 다해 응원하며.
혹여나, 나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꼭 하루라도 엄마의 갱년기를 따뜻하게 들여다 봐주기를 바란다. 엄마의 시끄러움을 들어주기를, 그 외로움과 혼란스러움을 안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