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엄마는 시를 쓴다.
언제부터였을까. 새삼 기억하려고 하니 그 시작점이 아득하다.
어릴 때는 몰랐다. 서른이 훨씬 넘은 지금에서야 가맣게 뒤돌아보면, 엄마는 늘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생이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4살 많은 나에게 덜컥 맡기고 맞벌이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도, 하얀 손으로 공장에서 화장품을 만들고 밤마다 애니메이션 필름지를 색칠할 때도, 구멍가게 아줌마가 돼 슬러시를 뽑고 담배를 팔 때도, 엄마의 얼굴은 담담했다. 어느 날 돈벌이로 찾아간 초등학교 급식소에서는 전쟁통 마냥 큰 솥을 보고 놀라 반나절 만에 도망 나왔다고는 했지만.
엄마는 대체로 강했지만, 흔들릴 때도 있었다. 다리 없는 벌레, 이를테면 애벌레나 송충이 따위를 유독 무서워해서, 이들이 출몰할 때면 늘 제일 두텁고 딱딱한 아빠 구두를 신고 나타나 벌레를 밟았다. 제일 무서워하는 건 배추벌레인데, 한 번은 김장철에 무농약 배추를 사 왔다가 몇 번을 놀래 자빠진 뒤, 그 후로는 무조건 농약 친 배추만 사 왔다고 했다. 그건 내가 27살이 돼서야 알았다.
그래도 엄마는 대체로 담담했고, 불 같은 성격의 아빠와 달리 엄마는 항상 다문 입술 뒤로 잔잔한 바다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엄마는 어딘가 모르게 늘 고운 티가 났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고, 예쁜 색깔의 과일을 좋아하고, 디즈니의 인어공주 애리얼을 좋아하고, 짠짠한 꽃무늬를 좋아하고, <사운드 오브 뮤직>과 <가을의 전설>과 <리버 와일드>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 때로는 퍼석했을 삶을 살아가면서도 속으로는 매일 뜨거운 낭만을 그렸을 엄마다.
두 딸이 대학에 들어가며 품 안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게 되자, 엄마는 돌연 "나도 대학에 가겠노라." 선언했다. 그제야 조금 덜어낸 책임감 덕분이었을까. 어쩌면 빈 둥지가 돼 버린 적막함을 새로운 소란으로 채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방통대에 들어가 국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엄마의 뜻을 전적으로 지원했다. ‘대딩’이 된 엄마는 인터넷이 낯선 탓에 리포트 하나 쓰기에도 애를 먹었다. 시립도서관에서 낡은 냄새 폴폴 나는 책들을 뒤져 자료를 찾고, 하루 9시간을 좁은 구멍가게에 앉아 이면지에 수기로 리포트를 썼다. 그럼 나와 동생이 번갈아 춘천에 와서 워드로 리포트를 옮겨 적고, 표지와 목차 같은 것들을 덧붙여 사이버 캠퍼스에 제출했다. 시험 기간엔 새벽까지 온라인 강의를 듣고 깜지를 써가며 눈이 숙 들어가도록 책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엄마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장을 따냈다.
방통대 시절부터였는지 그 전부터였는지 헷갈리지만, 그 무렵 엄마는 조금씩 시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종종 일기를 쓰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뒤 감상을 남기며 노트를 채우던 엄마였기에, 처음에는 그저 엄마의 시간에 시 쓰기가 잠시 더해진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문예창작반에 나가며 주기적으로 시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던 엄마의 시가 언제부터고 예사롭지 않더니 기어코 도 대회에 나가 장려상을 타 왔다. 한 동안 시가 안 써진다며 침잠하던 엄마는 최근 들어 또다시 깜짝깜짝 놀랄 만한 시를 써내 우리에게 보여주곤 한다. 박경리의 <토지> 전권을 몇 번이고 완독한 엄마의 저력을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늘 담담하다. 마치 그저 '내 속에 있던 어지러운 것들을 꺼내 놓을 뿐.'이라는 듯. 엄마의 시를 보고 있으면, 엄마의 시선이 된다. 잠시나마 엄마의 시끄러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늘 엄마는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엄마의 시를 보면 조금이나마 엄마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