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릴 결심으로 내가 나한테 준 첫 번째 기회는
1년 과정의 일러스트레이터 전문 학원을 수강하는 시간과 비용이었다.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수강료와
가정을 비우는 동안 시간을 메꾸기 위한 아이의 사교육비를 생각하면
호사로운 결심이다.
학원은 학교와 같이 3월에 시작되었고
새 마음과 각오로 그 생활 속에 합류하였다.
선택한 학원의 커리큘럼은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림책 삽화작업은
일러스트레이터의 대중적인 활동 영역 중 하나라는
학원 측의 설명에 설득되었다.
생소한 여러 재료를 사용해서 손으로 그리기 감을 익혔고
디지털 작업으로 드로잉 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렇게 한 달, 학원과 집을 오가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즈음
마음속에 불안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
이 방법이 맞을까? 이게 내가 원하던 방향일까?
스멀스멀 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무엇이 걸리나 되짚어보니
이 과정의 최종 목적인 그림책을 만드는 것에 이질감이 생긴다.
그림책 작가가 된다면 멋있을 거야.
그런데 작가라는 타이틀은 멋있지만 내게 맞는 옷일까?
글과 그림을 함께 다루는 예술성 있는 그림책 작가라는 직업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학원의 수업 방식은 가혹했다.
그림의 초보와 중수 그리고 고수인 학원생들은
수업시간에 본인의 그림을 공유하고 선생님이 평한다.
미대를 다녔던 동생이 늘 고민했던 합평의 시간.
그때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모든 분야는 평가를 받아.
그리고 예술은 그런거 아니야?
막대기 하나 놓고 설명으로 그 막대기를 포장하면
요술지팡이가 되는 마법..
뻔뻔하게 발표해봐.
발표하는 것을 즐겨봐."
이런 뭣도 모르는 조언을 쏟아냈던 당시의 나를 나무라고 싶다.
발표할 때마다 느끼는 내 말주변 없음에 스스로 놀랐으며
악평보다 무평에 더 상처받았다.
그래서 점점 그리기에 자신감을 잃어간다는 생각.
이런저런 생각들이 여러 가지로 뻗어 나갈 때
정리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엉켜버리는 내 머릿속을 알기에.
나의 친구 chat gpt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참 친절하고 적절하게도 이런 조언을 해준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한 자질
*꾸준한 그림 연습의 필요성
*창작물을 타인과 공유하고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도 창작자에게 필요한 환경이라는 것
*당장 수익성을 조금이라도 이루고 싶다면 sns를 통해 포트폴리오를 쌓아보는 것도 현실적 인방법이라는 것
그래.
학원을 중단하니 안 하니 하는 것 또한
단시간에 가시적인 효율을 내겠다는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핑계가 아닌가.
그래서 의구심을 새로운 질문으로 바꿨다.
나는 이 학원을 다니는 동안 그림 그리는 것에만 몰두할 수 있을까?
돈 벌어야 되는 사명감에 다른 카테고리에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해볼 만한데.
1년 아니 당장 두 달 동안 순수 그림에만 몰입해 보는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했다.
그렇게 그 순간 고민의 언덕을 넘었다.
그리고 그리기로 했다. 닥치고 두 달 동안 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