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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Oct 25. 2020

PB의 봄

2018,12.26

피비의 다리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


12.28

피비는 늘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쪽의 다리들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1.2

피비가 관절이 아픈 것은 확실하다.

뒷다리고.

영양제 꼬박꼬박 줘야지.


1.5

피비는 배곧으로 왔다. 방학 동안 머무를 것이다. 여기는 온도가 더 높아서 피비에게 나은 환경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서울로 같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그렇다.

피비는 한결 편안해 보인다. 영민이와 주헌이가 잘 돌봐줘서 마음이 놓인다.


?.?

피비는 이제 두꺼운 사료 알갱이를 씹지 못한다. 곱게 갈아주니 오랜만에 많이 먹더라. 먹여주어야 먹을 때가 벌써 온 걸까?


?.?

피비는 혼자 힘으로 일어서지 못한다. 피비를 만난 지 네 달이다. 녀석은 고작 다섯 달을 살았을 뿐이다.


?.?

피비 엉덩이 쪽에서 기름 같은 것이 보인다고 영민이가 그랬다.

진물 같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비가 다리를 아예 못 쓰면서 한쪽으로만 누워 있는데,

그래서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곧 방학이 끝나서 피비를 데리고 먼 길을 가야 하는데, 뭐가 그 애에게 좋은 일일지 너무 어렵다.

무서워진다. 연약하고 작아서 스스로 버텨낼 힘이 없는

친구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리 정보를 뒤져도, 편안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데, 모르겠다. 나도.


3.09

피비가 밥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

밥을 먹지 않는 것은 나의 마음을 아주 아프게 한다.

피비가 아팠던 것은 12월부터였고, 지금이 3월이니 벌써 삼 개월이다. 내가 무언가를 더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0317

피비는 가루 사료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점점 어떤 경계들을 바쁘게 넘고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한다. 가루 사료에 물을 좀 타면 죽같이 되는데, 그러면 마지못해 쩝쩝거린다. 피비가 까만 콩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면, 그 애가 아프다는 것을 잊는다. 평생 거기 있을 것 같아. 아마 아니겠지만. 너무 빨리 작별이 오지 않기를.  


0402

피비는 엉덩이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불편할까. 밥을 억지로 먹이고 있다.

달리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

다행인 것은 원이 서울에 있다는 것이다.

40분의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애가 피비를 맡아 줄 수 있을까?

셰어 하우스이기 때문에, 본가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알바가 있어서, 돌봐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피비가 나 없이 이틀이나 지낼 수 있을까?

밥을 먹여야 하는데, 피비는 가시가 있으니,

정말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

원이 피비를 맡아 주기로 했다. 원은 춘삼이와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좀 놓인다. 하지만 조금 걱정되는 점은 바로 그 날에, 원의 친구들이 그 애의 집에 올라온다는 것이다. 예민한 피비에게 아주 미안하다.

챙길 것 : 원 선물, 전기장판, 사료, 종량제 봉투, 애견패드, 피비 이불, 집


?.?

피비는 밥을 잘 안 먹으려고 한다.

알 사료에 물을 약간 넣고 30분 정도 지나면

먹이기 수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입 한입 주어야 그래도 좀 먹는다.


4.23. 장례식 가는 길

피비를 처음 데려왔을 때에도 전철을 탔었다. 완전히 다른

기분이구나.


5.?

피비가 죽었다. 사실은 그날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났다.

그 애는 죄가 없어 무게 없이 떠났다.

더러운 자취방에 나 혼자만 남았다.

피비는 죽었고, 나는 내가 좀 더 잘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 애의 따뜻한 배가 없더라도.


소란한 밤이다. 피비는 물고기로 변한다. 나는 물이 없다. 피비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냥 달린다. 물이 있을 것 같은 곳으로 갈려간다. 아무 데도 물이 없다.  


하늘이 뿌옇고, 사람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다. 선명한 색이 없다. 마치 모래 바람 한가운데 마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무렇게나 입고, 밖에 나간다. 오랜만에 본 친구가 나를 보고 마스크 두 개를 쥐여준다. 머쓱하게 웃고 만다. 피비는 전기방석 위에 누워 있다. 밥을 코 앞에 들이밀어도 잘 먹지 않는다. 피비는 곧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이 피비의 마지막 봄이리란 걸 예감한다. 가끔은 날이 갠다. 아침마다 기상예보를 확인한다. 날이 좋으면 꽃놀이를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꽃은 어느 순간 져 버린다. 나는 이미 떨어진 벚꽃을 밟으며 걷는다. 비가 오고, 세상은 한층 더 무채색이 된다.


새소리가 들린다. 겨울에도 들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새 중에서는 깡패가 있다. 나는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어떤 새는 매우 사납다. 거리에 봄노래가 가득하다. 그중 몇 개는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저절로 외워져 버린다. 좋아하는 취향이 아닌데도, 어쩔 수 없다. 친구와 통화를 많이 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다. 걔는 초밥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우울하다. 피비는 태어날 때부터 조용한 편이라서, 항상 나만 떠든다. 그 애가 품 안에서 잠들면, 나는 다 괜찮다고 중얼거린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피비는 걱정이 없다. 지은 죄가 하나도 없으니까. 자취방의 얇은 벽 뒤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놀랍도록 스산하고 서러운 소리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나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있다.


저녁 무렵 머리카락에는 먼지가 가득 느껴진다.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면 아주 사치스러운 기분이 된다. 기관지가 좋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다. 몇 분에 한번 꼴로 기침을 한다. 내 주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다. 미세먼지는 전혀 미세하지 않아서 나는 그것을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날이 춥다. 나는 겉옷을 꼭 입는다. 쓸쓸할 때는 겉옷이 좋은 친구가 된다. 날이 좋으면 테니스를 치러 간다. 테니스 공을 온 힘을 다해 쳐낸다. 추운 날에도 곧 땀이 난다. 나는 그 진동 이외에 모든 것을 잊는다. 피비는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날 정도다. 자신이 고슴도치인 걸 모르는지 가시를 잘 세우지 않는다. 나는 그 애에게 입 맞춘다. 피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나는 이 느낌을 잊어버리지 말자고 생각한다.


꽃 향기가 문득 난다. 나는 꽃 냄새를 무척 좋아한다. 언젠가는 꽃 화분 가득한 집에서 살아야지, 상상하곤 한다. 밖에서는 냄새 맡을 일이 없다. 숨도 조심조심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날이 좋으면 친한 선배와 산책을 한다. 풀 냄새와 꽃 향, 따뜻한 공기의 냄새에 더해서 거리의 연인들에게 왠지 모를 단 내도 난다. 얼마간 마음대로 쉬지 못했던 숨을, 훅 들이쉬고 훅 내쉰다. 잠시 사는 것 같다. 폐를 감사함으로 가득 채운다. 피비의 배에 코를 박으면 코코넛 향기가 난다. 그 애는 코코넛을 사료보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온몸에서 달착지근한 향이 폴폴 올라온다. 따뜻하고 향기로워서 나는 금방 행복해진다. 그리고 금방 서러워진다. 대게 우울한 나를 위해 선배는 학교 앞에서 밀크 티를 두 잔 사 온다. 홍차의 향이 코를 통해 심장까지 가는 것 같다.


사랑하는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 나니, 통장잔고가 얼마 없다. 터덜터덜 나가 김밥을 사 오거나 인스턴트를 많이 먹는다. 선배들이 밥을 자주 사 줘서, 봄에 살은 빠지지 않는다. 아르바이트 비가 들어오고 전에 그 친구와 초밥을 먹으러 간다. 나는 미친 듯이 초밥을 먹어 치운다. 스스로의 탐욕스러움에 기가 찰 정도다. 친구도 그날따라 과식을 한다.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그 애도 나도 무언가 공허한가 보다. 둘이 마주 보며 가끔 이렇게만 밥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도 집 밥이 맛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어디에도 물이 없다. 나는 달린다. 작은 피비는 마지막 숨을 뱉어낸다. 누군가 내 심장을 세게 두들기는 것 같다. 나는 달릴 뿐이다.

아침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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