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2
"죽은 건가요?"
"응. 죽은 거 맞아."
난 내 볼을 꼬집거나, 뺨을 때리거나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현실에 있을 법 하지 않은 곳에 내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알 던 곳, 아니 듣던 곳이랑은 많이 다르네요. 이렇게 책이 많은 곳일 줄은 몰랐어요."
"그럴 거야. 여기는 환승역이지, 반환점은 아니거든."
누군가 인터넷을 지식의 바다라고 부른다면, 냅다 내 옆에 있는 아무 책이나 주어서 그 사람 머리를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로 책, 아니 책이 꽂혀 있는 수많은 서가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붉은색 표지에 약 300페이지 정도 되어 보이는 책의 중간 부분을 펼쳐 보았다.
'아랍어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뭔 글씨야?'
밤새 술을 진탕 마시고, 잠도 안 자고 1교시 대학교 수업에 들어와 졸면서 필기한 것 같은 꼬부랑글씨가 있긴 했지만, 까만 건 글자 비스름한 것이오, 하얀 것은 종이라.
"아직 아니야."
아직까지 통성명도 하지 않은, 존재가 와서는 내가 읽던 책을 휙 낚아채더니, 책이 잔뜩 쌓여 있는 카트에 옮겨 담았다. 나는 (일단 도서관 같은 곳에서 책을 정리하니 사서가 어울릴 것 같은) 그를 뒤쫓아 가면서 물었다.
"여기는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일 것이고, 책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이겠지."
사서는 서가의 중간중간 빈 곳에 카트에 쌓인 책을 꽂아 넣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인간들 표현 중에 '무한 원숭이 타자기'라는 표현이 있지. 셀 수 없이 수많은 원숭이들이 무작위로 타자기를 치면, 그중에 셰익스피어 소설이 나올 수도 있다."
"진짜요?"
사서는 검은색 표지의 책을 서가에 꽂으며 마저 말을 이어갔다.
"수학적 가정이지. 여기는 무한한 공간에, 무한한 서가에, 무한한 책이 있지. 그리고 이 책들은 전부..."
"전부?"
"너의 다음 인생을 결정지을 경우의 수. 여기서 읽지 않은 책 중 1권이 너의 다음 인생이 될 거야."
"그래서 아까 반환점이 아니라 환승역이라고.."
"멍청하지는 않군. 이곳에서 네가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따라, 다음 너의 인생이 결정된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읽지 않은 책 중에서 결정되니까, 피하고 싶은 인생 스토리가 있다면 여기서 읽고 가도록 해. 네가 원하는 만큼 있으면서 읽고 가도 좋아."
"만약 여기 있는 모든 책을 다 읽는다면요? 읽지 않은 책이 없으니, 환생하지 않는 건가요?"
사서는 카트를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 나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멍청하지는 않지만, 수학을 잘하는 편은 아니네. 무한하다는 건,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뜻이지. 넌 결코 다 읽지 못해. 그리고 그렇게 말한 인간들 치고 오래 있는 걸 못 봤어.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책 페이지가 두껍다는 건, 장수의 의미. 즉 오래 살아서 이야기가 많은 것이고, 반대로 페이지가 얇은 것들은 단명하는 인생이야. 책 표지의 색에 따라서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달라. 빨간색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 대신 모든 것을 잃는 인생, 파란색은 타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없는 인생, 노란색은 예상치 못한 큰 행운과 불행이 찾아오는 인생, 하얀색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지만 결국 잊히는 인생, 검은색은 나만을 위해 사는 인생."
"부자가 되는 인생은 없나요?"
"부자는 인간들이 만든 기준이지. 설명은 다 끝났으니 이제 가서 책을 읽도록 해. 이제 책을 읽을 수 있을 거야. 지금도 무한한 원숭이들이 찍어대는 책들을 정리해야 해서 이만."
사서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위를 향해 한번 날리더니, 카트를 끌고 사라졌다.
나는 사서가 사라지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단 내가 죽은 것 자체도 믿기지 않지만, 스스로 인생을 포기했다고 벌을 주는 지옥 같은 사후세계가 없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서 읽은 책도 아니고, 읽지 않은 책 중에서 나의 다음 인생이 결정된다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 인생의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원치 않는 인생의 책을 읽어서 없애버려야 그나마 확률이 높은 건가?"
나는 일단 손을 뻗어서 내 옆에 가장 가까이 있는 책을 잡고 읽기 시작했다.
"하필 사고사로 죽는 걸 고르다니. 그래도 이 인생은 피했으니 다행인 건가. 무난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인생을 놓치는 건 아쉬운데. 그런데 필력은 영 별로네요. 원숭이 씨."
작가를 욕하면서 나는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고프지도, 배설 욕구도, 잠도 오지 않은 상태로 나는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불행한 인생으로 점철된 책을 읽으면, 이 인생은 피했다는 안도감. 부유한 집에서 행복한 유년 시설을 보냈지만 단명하는 인생은 짧지만 행복하게라도 살아볼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 처음부터 끝까지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인생의 내용을 읽고는 이 책을 고른 나 자신에 대한 분노. 100권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몇 권을 읽었는지도 세지 않았다. 이제는 처음에 읽었던 책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문득 사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네가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따라, 다음 너의 인생이 결정된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읽지 않은 책 중에서 결정되니까.]
"사서는 읽지 않은 책 중에서 무작위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하지 않았어.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했지. 즉 내가 골랐지만 읽지 않은 책이 내 다음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오 최고 기록이네요. 이렇게 짧은 순간에 캐치해 내다니. 그 책으로 선택하셨나요?"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사서는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 책이 가득 실린 카트를 끌면서 내게 말했다.
"제가 추측한 게 맞나요? 읽지 않은 책 중에서 무작위로 다음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읽지 않은 책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이 다음 인생으로 정해지는 것이?"
"맞아요. 이곳에 오기 전, 그러니까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마지막 순간에 속으로 품던 의문 기억하나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된 거지?'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아니에요. 그때는 조금 더 오래 걸리긴 했지만 지금처럼 직접 책을 선택했어요."
"그 말은..."
"당신의 인생은 신이든 누군가가 정해 놓은 운명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오롯이 당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당신이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인생도 아니에요."
사서는 위를 쳐다보며 또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당신이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건 약간의 우연과 그 우연으로 비롯된 제한된 정답이 없는 선택지. 당신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니 당신의 인생은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어요. 심지어 당신이 스스로한테 하는 비난마저도."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정.. 정말.. 내가 잘 못한 게 아닌 거... 죠?"
사서는 내가 들고 있는 검은색 표지의 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죄책감과 후회는 잊으세요. 다시 묻겠어요. 그 책을 선택하시겠어요?"
"저... 저는..."
[스트레인져 댄 픽션] 영화를 보면
스트레인저 댄 픽션
감독 마크 포스터
출연 윌 페렐, 매기 질렌할, 더스틴 호프만, 퀸 라티파, 엠마 톰슨, 토니 헤일
개봉2007. 09. 06.
자신의 인생이 비극만을 쓰는 작가의 작품대로 흘러가고 있고, 결국 나는 소설의 내용대로 비극적으로 죽을 것임을 알게 된다.
기욤 뮈소의 소설 [인생은 소설이다]의 내용도 주인공이 결국 누군가의 소설 내용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소설이다
저자 기욤 뮈소
출판 밝은세상
발매 2020.11.24.
가끔 웃긴 트위터 중에도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이거 쓴 놈 누구냐'를 본 적이 있다.
위 3가지의 공통점은 누군가가 의도해서 쓴 소설이라는 점이다. 나의 감정과 선택이 결국 타인에 의해 정해져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된다.
그때 우리는 자유의지를 막는 작가를 비판한다.
하지만 작가가 없는 소설이라면? 비판할 대상이 신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100% 인간의 자유의지가 적용되지 않는 애매모호하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누구의 덕,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