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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01. 2021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안동의 한 농촌 시골마을에서 성자처럼 살다가 숨진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1937~2007)은 그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에 실린 <'비참한 사람들'의 삶>이라는 짧은 글에서 "<레미제라블>은 대중소설로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너무 반가웠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확고한 자신감은 없었다. 누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이냐고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주저하면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외국소설 중에서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라고 대답하곤 했기 때문이다. 권정생 선생의 글을 확인함으로써, 앞으로는 좀 더 자신 있게 "레미제라블"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 어린 시절,  '장발장'으로 알려진 이야기를 한 번쯤 안 듣거나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한 권으로 축약한 발췌본이 아니라 무삭제의 전편을 다 읽은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소설은 일반적으로 재독, 삼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도 웬 만한 소설은 한 번 읽고 쳐박어 두는 편이다. 그러나 몇 번 반복해서 읽는 소설이 간혹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레미제라블>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동서출판사의 6권짜리 번역본이다.


  <레미제라블>의 이야기 전개는 모두 잘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내가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심리 묘사와 사회 묘사가 균형이 잡혀 있고,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프랑스 사회뿐 아니라 각종 인간 군상의 삶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간 보편에 관한 이해도 깊게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친구는, 최근 한국소설은 사회 묘사는 없고 개인심리 묘사만 있는 것 같다고 한탄했는데, 공감이 간다.


   심리묘사 중에서 내가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긴장하면서 읽은 대목은 마들렌 시장으로 변신한 장발장이, 경찰이 자신과 착각해 체포한 사람을 재판에 붙일 때 자진 신고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하루아침에 검은 머리가 되도록 고민하는 장면이다. 


  또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오는 도둑의 소굴, 빈민가, 수도권, 거대한 파리의 하수도, 바리케이트 현장 등 당시의 사회상을 눈에 보듯이 알 수 있다. 다만, 아주 지루했던 곳은 워털루전쟁 부분이다. 지도를 보여주는 것처럼 너무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그냥 건너뛰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내가 워털루의 지형까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서양의 역사현장이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미를 전혀 없이 기계처럼 자신의 직무에만 철저한 냉혈한 자베르 경감과 전쟁터뿐 아니라 이익이 되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덤비는 떼나르디에 등 악인에 대한 묘사도 매우 뛰어난 것 같다. 읽으면서 주먹으로 쥐어박을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미제라블>은 소설 외에도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져 소비되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12대 대통령선거일에 개봉된 영화는 매우 인기를 누렸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후보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달래며 후일을 꾀하기로 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의 합창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너는 듣고 있느냐/분노한 민중의 노랫소리를/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민중의 음악을/너의 심장소리가 북소리와 하나 되어 울릴 때/내일이 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


 그러고 보니, 또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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