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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Feb 06. 2023

일본의 '조선 멸시관'은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됐다.

청일전쟁, 무쓰 무네미쓰, 조선멸시, 건건록, 건건록의 세계

전전과 전후를 통틀어 일본 외상 중에서 무쓰 무네미쓰 외상(1892~1896년 재직)의 동상만 유일하게  외무성 안에 세워져 있다.


외상으로서 무쓰 무네미쓰의 업적은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대상으로 막부 말기부터 맺어진 불평등조약을 개정한 것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당시 일본 외교의 숙원이었던 영사재판권을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발판을 놓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업적 때문에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에서 근대 일본 외교의 상징적 존재로 추앙 받고 있다. 일본 외무성 안에 세워져 있는 그의 동상은 이런 인식의 반영물이다.


그런데 과연 무쓰 무네미쓰가 그토록 추앙 받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건건록의 세계>(논형, 나카쓰카 아키라 지음, 이용수 옮김, 2023년 1월)는 무쓰가 외상 재직 시절에 쓴 청일전쟁에 관한 비록인 <건건록>(논형, 무쓰 무네미쓰 지음, 나카쓰카 아키라 교주, 이용수 옮김, 2021년 8월)의 집필 과정 및 배경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분석하면서, 이런 의문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인 나카쓰카 아키라는 전 나라여자대학 교수로, 1960년대 초부터 일본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조선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책임을 추궁해온 역사학자다. 그런 그가 조선에 대한 첫 무력 개입 전쟁인 청일전쟁, 그리고 <건건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하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 책 서장에서 책을 쓴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무쓰가 왜 <건건록>을 썼을까를 사료 발굴과 고증을 통해 밝히는 것이다. 둘은 <건건록>에 나타나는 이른바 '무쓰 외교'의 실태를 밝히고 그것이 근대 일본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즉,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파탄이 '메이지의 배신'의 결과인가 아니면 '메이지의 유산'에 의한 것인가를 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서장(태평양전쟁과 무쓰 외교), 제1장(<건건록>의 간행 사정), 제2장(<건건록>의 세계), 제3장(무쓰 외교의 역사적 위치와 그 의미), 제4장(태평양전쟁 전야의 무쓰 무네미쓰), 종장(현재와 연결된 문제)로 구성돼 있다. 1장과 2장이 무쓰가 왜 <건건록>을 썼을까를 고증하는 부분이고, 3장 이하에서는 무쓰 외교가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장 구분이 무색하게 1장과 2장이 책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일본 학자 특유의 꼼꼼함과 치밀함, 철저함으로 무장한 채 무쓰가 초고, 제1완성본, 제2완성본으로 가면서 어떻게 내용이 변했고, 그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추적했다. 그는 이를 통해 무쓰가 <건건록>을 쓴 것은 "바야흐로 나라의 내외에서 승리를 점한 -'천황의 불신임'도 이겼다- 무쓰가, 그 '영광의 기념패'로서 속에서부터 끓어 넘쳐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쓴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3장 이하가 '무쓰 외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부분인데, 저자는 많은 전문가들이 '리얼리즘 외교'로 칭찬하는 무쓰 외교에 대해 "그것은 주로 열강이 어떻게 움직일까에 대해 결사적으로 신경썼다는 것이고, 조선과 중국 특히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열강에만 중점을 두고 피해국(조선과 중국)을 외면한 일면적인 무쓰 외교 평가가, 근대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얽혀 있는 '아시아 멸시'의 고질화에 메스를 대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쓰가 주도면밀하게 지도한 '조선왕궁 점령 사건'(1884년 7월 23일, 청일전쟁의 사실상 시발점이 된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여 뒤 미우라 고로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주도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청일전쟁의 개전으로 이끈 조선왕궁 점령 사건을 무쓰 외교의 '빛나는 성공'으로 꼽고 있다. 저자는 바로 무쓰 외교에 대한 이런 평가가 다음 해 명성황후 살해라는 만행을 불러온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명성황후 사건뿐 아니라 요즘 일본이 강제동원 문제 해법과 관련해 고압적 자세를 보이는 것도 이때 싹 튼 조선 멸시관에 뿌리를 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무쓰 외교에 관한 과장되고 일면적인 평가는 '훌륭한 메이지, 나쁜 쇼와'라는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청일, 러일전쟁까지는 국가 지도자의 눈이 맑았고, 국제적으로도 선택을 그르치지 않은 일본이 이 이후 점점 군부가 독주하고, 국민도 집단 히스테리가 된 듯이 전쟁과 파국의 길로 치달았다는 견해 등과 무쓰 외교 칭송론(또는 쇼와시대 군부 책임론)이 근원을 같이하고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 국민 작가로 꼽히는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이 이런 역사관에 서서 쓴 대표적인 소설이다. 일본의 전후를 설계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도 "태평양전쟁의 파탄은 메이지 유산의 결과가 아니고 그에 대한 배신이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역사관에 대해 "과연 그런가. 군부와 국민을 광분시키고 만주사변부터 중일 전면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길로 향하게 한 그것과 청일, 러일전쟁은 무관한가"라고 통렬하게 묻고 있다. 당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 , 무쓰 무네미쓰, 고무라 쥬타로 등의 선택이 군부와 국민의 광분에 책임이 있고 그런 책임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윤석열 정부 외교 당국자들의 일본 외교에 관한 인식이 나카쓰카 교수의 100분의 1 정도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


참고로, 이 책은 <건건록>과 같이 읽어야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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