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을사년 설 연휴가 꽤 길었다. 설은 1월 29일(수요일)인데 전후가 공휴일이나 원래는 화수목 3연휴다. 그런데 정부가 국내 소비를 진작한다는 이유로 월요일(2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바람에 전 주 토요일부터 목요일까지 6연휴가 됐다. 징검다리 휴일이 된 금(31일)까지 휴가를 내면 장장 9연휴를 즐길 수 있었다.
한참 일에 치일 때는 쉬는 날이 길면 길수록 좋지만, 너무 길어도 지루하다. 이럴 때 당기는 게 영화다. 주변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니, 넷플릭스에서 나온 <터닝포인트 : 핵무기와 냉전>을 소개해 줬다.
넷플릭스에서 '터닝 포인트'라는 단어로 검색을 하니, 모두 3건이 떴다. 하나는 <터닝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의 단순 극영화였다. 9/11을 다룬 터닝포인트는 5회짜리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본 적이 있다. 9/11 테러의 배경과 그로 인한 미국 사회의 통제 강화 등이 담긴 훌륭한 작품이다.
추천받은 작품은 2024년 3월에 출시된 것이다. 9회짜리 시리즈물로 한 편 당 1시간 반 정도 되는 대작이다. 대략 3일 정도에 걸쳐 완주를 했다.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는 핵무기가 중심인가 하고 봤는데, 실제로는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러시아)의 패권 경쟁이 중심이다. 물론 그 핵심에는 핵무기가 있다.
맨 첫 회의 첫 장면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습인 것으로 봐,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2차대전 이후 80년 동안의 세계사, 미-러의 패권 경쟁을 정리해 보겠다는 기획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다큐를 보지 않더라도 세계사가 핵무기 이전과 이후로 나뉠 뿐 아니라 질적으로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다큐를 보면, 핵무기가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상상을 절하는 끔찍한 무기임을 몸서리칠 정도로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또 핵무기가 세상을, 국제정치 판을 완전히 바꿔놨다는 것도 훨씬 강도 높게 실감할 수 있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일본에 두 발의 핵폭탄을 터뜨리면서, 드디어 세계적인 핵무기 경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일본에서 수십만 명이 숨진 비극이 일어난 뒤, 소련은 미국에 뒤질세라 핵무기 경쟁에 뛰어들고 개발에 성공한다. 더 이상 일본에서 일어난 비극이 재발돼서는 안 된다는 절제와 윤리가 강화된 것이 아니라, 상대보다 더 강한 무기를 가져야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욕망과 경쟁심이 분출했다.
냉전은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됐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핵을 가지면서 시작됐다고 하는 것이 맞다. 즉, 핵무기가 존재했기 때문에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다큐의 부제목을 '핵무기와 냉전'이라고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핵무기는 상대를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다. 때문에 핵을 가진 미국과 소련은 서로 직접 전쟁을 피하고 대리전쟁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냉전의 본질이다.
서로 핵무기를 가진 상태에서 패권 경쟁에 돌입한 미국과 소련은 때때로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위기 상황에 빠진다. 베를린 봉쇄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대표적이다. 또 간혹 제어장치의 이상과 판단 착 오로로 핵 전쟁에 빠질 위기도 있었다.
1983년 일어난 소련군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의 예가 그렇다. 그는 당시 핵 경보장치에 미국이 소련을 공격하는 핵대륙간도탄을 발사했다는 신호가 뜨자, 그럴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핵 대응 공격 코드를 입력하지 않았다. 실제로 얼마 뒤 그 신호가 인공위성의 태양광의 반사를 핵 공격으로 잘못 감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사람의 순간의 판단이 미국과 소련뿐 아니라 인류를 구한 것이다.
핵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1983년 일어난 대한항공 격추 사건도 미소 냉전의 산물이다. 미국은 격추 사건 전에 소련에 근접한 북태평양 근처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했고, 이에 예민해진 소련군은 자국 영토를 침범한 대한항공 여객기를 미사일로 쐐 격추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런 내용이 이 다큐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제까지 나도 잘 몰랐던 내용이다.
핵으로 상호 전쟁을 억지했던 미국과 소련의 세력 균형은 1991년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초강대국 등장으로 깨지기 시작한다. 냉전시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만든 나토는 점차 소련의 지배권이었던 동구로 세력을 확장하고, 러시아는 안보 차원에서 반발하기 시작한다. 특히, 소련의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인 재앙'이라고 했던 푸틴이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러시아 영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일어난 러시아 쪽의 대응 성격이 짙다. 더구나 푸틴은 더 이상 러시아에 위기가 닥치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고 있다. 그 정도로 핵무기 개발 이래 지금의 세계가 핵 전쟁, 인류 절멸의 위기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을 생각하면 핵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아마 노벨평화상위원회가 2024년 노벨평화상을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에 준 것도 그런 경고를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다큐에는 미국과 소련(러시아), 유럽의 정상과 군사, 외교 관련 저명인사들이 등장해 연설하고 증언하고 설명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질 높은 다큐의 장점이다. 하지만 전체 내용에서 새로 주역으로 등장한 중국의 비중이 너무 작고, 새로 핵 국가로 등장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의 얘기가 거의 없는 것은 한계다. 또 미국이 만든 다큐여서인지 균형추가 미국과 서방의 중심으로 많이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는 아주 훌륭한 2차대전 이후 세계사 학습자료임이 분명하다. 나도 몇 차례 더 보고 공부할 생각이다.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