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불러낸 날

by 승아

일 때문이라고, 시간이 없다고, 아직 월급도 받지 못했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여러 이유를 붙이며 일 년째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조용히 눌러왔다. 사실 어떤 바다라도 괜찮았다. 이름 값있는 여행지가 아니어도, 멀리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그저 넓은 수평선이 펼쳐지는 곳이면 충분했다. 그곳에 앉아 멍하니 물결이 오고 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착각 속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조차 지금의 나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쌓여가는 일들, 빠듯한 통장, 숨 한번 돌리기 어려운 시간들. “여건이 안 된다”는 말은 어느 순간 내 삶을 묶는 습관이 되었고, 그 문장에 기대어 바다를 향한 마음을 계속 접어두었다. 언젠가 가겠지, 하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삼일 연속으로 얻은 소중한 휴무의 아침,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휴대폰을 켰다. 그리고 주저 없이 여수 엑스포로 향하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돌아오는 표도, 숙소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은 없었다. 남아 있던 빈 좌석 하나가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손끝에 닿았다. 작은 가방 하나에 필요한 것만 챙기고 집을 나섰다. 바리바리 무겁게 챙기기 싫었다. 기차 출발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바다를 향한 내 마음은 이미 훨씬 앞서 달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눌러두던 그리움이 그날따라 더는 막을 수 없을 만큼 차올라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도시에선 맡을 수 없는 바닷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치자 마음속 무언가가 단번에 흔들렸다. 택시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딱히 끌리지 않았기에 한참을 걸었다. 서서히 파도 소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나는 왜 이곳을 향해 달려왔는지 명확히 알 것 같았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해 질 때까지 바다 앞에 앉아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파도는 부서졌다가 이어지고, 햇빛은 각도를 바꾸며 물결 위에 은빛 선을 그었다. 그 단순한 반복이 묘하게 나의 마음속 단단해진 긴장을 풀어냈다. 오래된 감정들이 파도처럼 천천히 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숙소를 잡았고, 운 좋게도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객실에 머물 수 있었다. 호텔 유리창 너머로 수평선이 길게 펼쳐져 있었고, 나는 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창가로 다가가 한참을 서 있었다. 밤이 내려앉자 바다는 잿빛으로 가라앉았고, 그 잔잔한 어둠 속에서 나 역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피로가 아니라,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함이었다. 딱히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은 눈물도 함께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다였다. 통 큰 유리창이 있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비어있는 컵 다섯 잔을 앞에 두고 여섯 시간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바위를 스칠 때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긴장들이 풀렸고, 시간은 마치 멈춘 듯 흘렀다. 돌아가야 할 기차 시간이 다가왔지만,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기차표를 취소했고, 같은 호텔에 다시 묵었다. 그것은 충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나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

그렇게 또 하루를 바다와 마주하며 생각했다. 현실을 버티게 하는 건 커다란 용기도, 특별한 사건도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다시 채워주는 단 한 번,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돌아오는 날 아침, 내가 지금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현실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 바다의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쉽게 놓고 싶지 않아서라는 걸. 여기서라면 마음이 맑아지고, 숨이 깊어지고,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 평온이 얼마나 오래 나에게서 비켜나 있었는지 생각하니, 돌아갈 시간이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짐을 정리했다. 이 순간을 붙잡고 눌러앉고 싶었지만, 이 여운마저도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바다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그 시간들은 나를 현실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기 위해 기꺼이 돌아가게 만드는 힘에 가까웠다. 현실이 갑자기 가벼워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언젠가 또 바다를 보러 올 수 있다는 마음 하나가 살아가는 숨이 될 것 같았다.

역으로 향하는 길, 마음 한쪽이 천천히 저며왔지만 이상하게도 버틸 만했다. 나는 다시 일상을 살아낼 것이다. 완전한 힘으로가 아니라, 이곳에서 얻어온 잔잔한 파동을 품고서. 언젠가 또 너무 버거워져 숨이 막히면, 나는 그 답답함을 외면하지 않고 바다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나는 다시 살아갈 것이다. 다음번엔 더 빛날 윤슬을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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