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없었던 내가, 내일 하루를 생각한다는 건 기적과 다름이 없다. 예를 들면, 출근을 하기 위해 알람을 맞추거나, 퇴근 후 약속을 잡는 일. 심지어 규칙적인 일주일치 계획을 세우고, 길게는 두 달 후의 일정을 미리 정리해 두는 나 자신을 보면 믿기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내일을 상상하지 못했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잠만 자던 나는, 이제 새벽에 눈을 떠 요가 매트를 펴고, 창문 사이로 비치는 달빛을 바라본다. 요가 선생님이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시원한 새벽 공기가 스며든다. 요가원 안은 땀과 열기로 가득 차 있고, 그 안에서 내 몸이 천천히 달아오른다.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느낀다.
나는 살아 있구나.
숨을 들이쉴 때마다 생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내쉬는 숨 속엔 어제의 잔상이 조금씩 흩어진다. 습도, 공기, 빛. 이것들이 내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물셋이 될 줄 몰랐다. 곧 스물넷. 나는 스무 살을 맞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열일곱 살 때 적은 유서만 보아도 그전에 이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가끔 습관처럼 “벌써 스물셋이야” 하고 말할 때, 사람들은 농담처럼 웃지만 그 말엔 나만의 진심이 담겨 있다.
나는 열일곱 살에 독립출판물을 냈고, 공황장애라는 걸림돌에서 몇 번의 시도 끝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멀리 여행해 본 적은 많지 않지만 세 나라를 직접 발로 밟았고, 새로운 문화 속에서 나 자신을 확장시켰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그래도 웃으며 살아왔다. 신앙생활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사회생활을 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배웠다. 첫사랑과 웃고 울었던 시간도 있었다. 독립을 하며 부모님의 존재를 새삼스레 느꼈고, 삶이란 결코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래서 이제는 아주 먼 미래보단, 눈앞의 오늘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살아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이십 대의 반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감사하다.
누군가는 23년이라는 시간을 짧다고 말하겠지만, 내가 살아낸 23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건 기적이었고, 싸움이었으며, 나를 증명한 시간이었다. 나는 죽음보다 삶을 선택했고, 절망보다 희망을 붙잡았다. 무너져 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거창한 계기가 아니라, 그저 내일의 알람 하나를 맞추는 작은 의지였다.
이제 나는 안다. 대단하다는 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한 번 더 살아보려 애쓴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요가 매트 위에서 숨을 고른다. 숨이 이어지는 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