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은 사람을 가라앉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죄책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실제로 죄를 저질렀을 때 생기는 죄책감
2. 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낄 때나 남들이 잘못했다고 할 때 느끼는 죄책감.
첫 번째의 경우, 죄를 저지른 후 문제를 바로잡았다면 더 이상 느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두 번째이다.
두 번째 유형의 죄책감은 '죄'를 저지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죄책감의 순기능은 없고, 자신의 정당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억누르거나,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억누르게 만드는 역기능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죄책감은 에너지를 억누르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아가는데 방해가 된다.
예 1. 예를 들어 육아를 하면서 부모로서 힘이 들 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힘이 든다고 해서, 도망치고 싶다고 해서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지만, 지금의 감사함을 느낄 줄 모르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죄책감이다. 이런 죄책감은 느낄 필요가 없다. 만약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이 신호는(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부모를 건강한 부모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유용한 신호(생각)이다. 최근, 나도 육아를 하다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숙고 끝에 나는 이런 죄책감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래 아빠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는 거지 뭐...
예 2. 또 다른 예로서는 사회적으로 여성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들, 남성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들을 갖추지 않았을 때의 죄책감이다. 세상은 은근히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은 임신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도덕적 압박이라든지, 남성은 능력이 있어야 하고, 강해야 한다는 압박 같은 것은 불필요하고, 삶을 억압하는 불필요한 죄책감이다. 임신은 압박이나 죄책감에 의한 것이 아닌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능력과 진정한 강함은 죄책감(혹은 수치심)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고, 배려와 열린 자세에서만 얻을 수 있다. 비슷 한 예로, 여성은 문란하면 안 되고 남성은 문란해도 된다는 식의 잘못된 사고방식은 불필요한 죄책감을 만들 수 있다. 남성과 여성, 둘 다 문란해서는 안된다. 섹스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순간의 쾌락보다는 자신의 몸이 훨씬 더 소중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필요하다.
예 3. '까라면 까'라는 군대식 문화에서 구성원에게 주는 죄책감이 있다. 과도한 업무를 밀어 넣고 네가 이걸 못하면 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쌍팔년도식 회사문화가 주는 죄책감이 있다.(아직도 이런 회사가 실제로 있다.) 능력은 죄책감에서 나오지 못한다. 오히려 자부심이나 감사하는 마음, 고요한 마음, 연결된 느낌에서 나온다. 나는 과거 이런 회사에 다녔다. 아주 보수적인 공공기관이었기에 가능했던 문화였다. 나는 이런 회사를 하마터면 정년까지 다닐 뻔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런 회사에서 나와서 더 넓은 세상에 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예 4. 권력이 구성원을 통제하기 위해 만드는 죄책감이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잘못된 애국심 같은 것이 그런 권력형 죄책감 유발체이다. 과거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가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지 국민이 국가가 추구하는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런 사고방식을 국민에게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희생하여 얻을 가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 5. 부자가 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나를 바보처럼 살게 하는 죄책 감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덧 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물질만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물질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것은 결국 그 물질을 얻음으로써 생기는 감정이다. 그런 물질추구는 물질의 노예가 되고 그렇기에 물질주의자는 마음의 천국을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로 살라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가치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고 부도덕한 일이니 애초에 나는 부자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은 나를 가라앉게 만들고 도움이 되지 않는 죄책감이다.
예 6. 자신의 실수나 단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가 느끼는 죄책감도 있다. '내 방은 왜 이렇게 항상 지저분할까?', '나는 왜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할까?', '나는 왜 이렇게 내성적일까?'라는 생각은 스스로를 위축시키기게 만들 뿐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괜찮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단점이 아닌 장점에 집중하고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자. 그 마음이 회복탄력성이 커지게 만들고 면역력을 강화시키고 행복하게 만든다.
그 밖에도 우리는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관념 때문에 불필요한 죄책감을 많이 만들며 살아간다.
죄책감을 해결하는 방법
1.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다.
Q.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실제 '죄'를 저질러서 느끼는 것인가?
2. 실제 죄를 저지른 데에 대한 죄책감이 드는 것이라면, '죄'에 대해 사과를 하든, 벌을 받든 해야 한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기에 지나간 죄책감은 곱씹을 필요가 없다.
3. 그렇지 않다면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4. 불필요한 죄책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하고, 죄책감 대신 감사함에 집중한다.
예 1.) 내가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그 생각이 나에게 주는 정보 -쉬어야 한다는 정보-에 감사해한다.
예 2.) 내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죄책감을 가지기보다. 성생활의 기쁨과 흥분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다.
예 3.) 무능력함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기보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을 발견한 데에 감사함을 느낀다.
필요한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