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달은 마음이 유난히 힘들었기에, 주말이 아닌 평일 퇴근 후에도 자주 방탈출을 했다. 6시에 퇴근을 한 뒤 황급히 나가 역까지 뛰어간다. 시청에서 강남까지는 전철로 40분 정도 걸린다. 방탈출 시작 시간은 7시다. 다행히 딱 맞춰 갈 수 있겠다. 회사가 어려워져서 월급이 반이 나왔을 때,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졌을 때, 친하던 동료들이 떠나갔을 때. 슬픈일이 있을 때 방탈출러들은 방탈출을 더 많이 한다. 그 달은 통장이 텅장 되는 달이다.
바쁜 탈출러는 슬퍼할 새가 없다.
방탈출은 1시간 정도의 시간 제한이 있다. 주어진 시간동안 문제를 풀어 방을 나가야 한다. 실패를 한다고 큰일이 일어나는건 아니지만, 막상 게임을 하면 성공하고 싶다. 때문에 지문을 열심히 읽는다. 나레이션을 집중해서 듣는다. 문제를 풀기 위해 바쁘게 주변을 둘러본다. 초 집중 모드다. 그래서 방탈출을 시작하면 현실을 잠시 잊게 된다. 현실은 싹 잊혀지고,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요원A인데 이제 뭐가 더 슬프겠어.
"당신은 요원 A입니다. 미션을 완수하세요."
방탈출을 하다보면 스토리 상 역할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나는 요원A로 미션을 수행해야만 한다. 더 이상 짤린 회사원이 아니다. 더 이상 차인 여자도 아니다. 방탈출을 하다보면 그들은 나의 이름과 역할을 계속 되새김질 해준다. "요원A는 이걸하세요!" 라는 지문이 있기도 하고, 심지어 직원이 방탈출 내에서 내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요원A라고 답변해야 한다. 계속 이렇게 세뇌(?)당하다보면 몰입이 된다. 나는 어떤 방탈출에서 상자를 열었을 때, 내가 부여받은 주인공 이름의 사원증이 나오자 "나잖아!"라고 외친적이 있다. 그런 과몰입에 옆에 있던 동료가 웃겨서 빵터진적이 있다. 스토리에 집중 시키는 방탈출을 하게 되면 그만큼 깊게 빠져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미션이 해결되면 진짜 요원A로서 미션을 해결한 듯 기쁘고 행복하다. 현생은 힘들었더라도 요원A는 더이상 슬플 새도, 힘들 새도 없다.
슬픔은 공포로 극복하자.
주변 사람이 혹시 헤어졌다면, 큰 외로움에 처했다면? 술에 의존하지 말자. 괜히 "자니..?" 이런 문자나 보내게 된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스릴러 혹은 공포 방탈출에 가보자. 공포 방탈출은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감정이 개입할 틈이 없다. 게다가 공포보다 더 큰 두려움은 방을 나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공포를 느끼면서 동시에 두뇌도 풀가동 해야 한다. 두려움에 바닥을 헤집는 친구의 모습을 보다보면 즐거운 추억도 생길수 있다. 방탈출을 끝내고 나면, 시간이 정말 후딱 갔다는 생각이 든다. 전연인 따위 공포로 잊어버리자.
일어나 리뷰써야지
방탈출이 끝나고 나서, 여운이 깊게 남는 경우도 있다. 명작 영화를 보고 나면 여운이 깊게 남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끝나고 카페에 가서 사람들과 어떤 문제가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는지 이야기 하는것도 즐겁다. 그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다. 누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활약했는지를 나누다보면 시간이 후딱 간다. 끝나고 리뷰를 작성하는것은 귀찮지만 추억을 남기는거라 즐겁다.
결국 방탈출을 하면, 몰입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살짝 도피할 수 있다. 다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볼 수 있다. 괴로움을 잊고 정신없이 문제풀이와 역할에 몰입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눈물은 방탈출로 닦자. 테마가 끝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세상은 약간 덜 슬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