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웬수같은 인간아!”
종점에 다다른 버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고, 버스의 불이 다 꺼지자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의 남편이 터덜터덜 버스에서 내렸다. 하마터면 좀비인 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금 본인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났다. 전화를 걸었다.
“버스 뒤로 와라 이 웬수야!”
“버스 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나도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버스 뒤에 있다.”
이게 어떻게 된일인고. 남편 직장에서 집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오늘 회식이 있어서 술을 마신다고는 했는데 막차 시간이 될 때까지 연락이 없어 전화해보니 중언부언하기는 하지만 버스정류장에서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후로 연락이 끊겨버린지라 집에 있던 나는 실시간 버스앱을 보며 버스가 동네에 도착하는 시간을 체크했다.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집까지 또 20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차로 버스정류장까지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미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비상깜빡이를 켜놓고 멀리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도착하고 하나둘 사람들이 내리는데 그중에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걸 탔어야만 하는데…?’
버스는 한차례 사람들을 퉤! 하고 뱉어내고 다시 출발했다. 남편이 아직 버스 안에 있을 터, 나는 버스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게 웬 한밤의 추격전이란 말인가. 그리고 다음 정류소에 다다르자 서서히 멈춰서는 버스. 나도 그 뒤를 따라 멈췄지만 이번에도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출발하는 버스 뒤를 쫓았다. 그리고 종점. 종점에 멈춰서도 한동안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버스를 정리하던 기사 아저씨 눈에 발각되어 한참이 지난 후에야 버스 밖으로 나왔다.
영문도 모른 채 차에 올라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왔냐며 나를 영웅 보듯 하는 남편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술을 워낙 좋아하는 부부이다 보니 가끔 이런 해프닝이 있는데, 다행히 아직은 화가 나고 싸움이 되기보다는 웃고 넘기는 수준이다. 술은 이런 해프닝보다 우리에게 주는 장점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술을 아주 좋아하고,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더더욱 좋아한다. 아닌 말이 아니라 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첫 만남에서 와인 한잔이 없었다면 영영 호감을 느끼지 못해 두 번째 만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첫 만남은 그랬다.
톡.톡톡.톡톡.
내 손가락이 바쁘게 스마트폰 위를 오간다.
- 야 오늘도 망함. 두시간 내에 끝낼게. 술이나 마시자.
길 건너에 오늘의 소개팅 상대로 추정되는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올해만 벌써 스무 번째 가까이 되는 소개팅이었다. 많은 걸 바란 건 아닌데 늘 나의 이상과는 꽤 거리가 먼 남성분을 마주해야 했다. (물론 남성분들도 그렇게 느끼셨을 수 있다는 점에 사과를 표하고 싶다) 종로 금강제화 앞에서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가 인사동에 예약해두었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의 첫인상은 스마트하다기 보다는 깐깐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그런 첫인상과는 달리 두리번거리며 레스토랑을 못 찾아 헤매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나는 인사동에서만 꽤 여러 번 소개팅을 한지라 그 헤매는 모습만 보고도 어느 레스토랑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안다미로 찾으세요?”
“네! … 네?”
내가 마음을 읽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는 그를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 파스타를 하나씩 주문하고 간단하게 소개를 나눴다. 그리고 적막.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왜 이렇게 파스타는 안 나오는 건가, 입이 바싹바싹 말라갈 때쯤 그가 말했다.
“와인 딱 한 잔씩만 할까요?”
관심법 쓰세요? 그래 와인이라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 한마디에 불편했던 마음이 일순간 사라지고 이게 어쩌면 우리의 첫 번째 공통점일 수 있을 것 같아 호감이 적립되는 모멘트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콜을 외쳤다. 그리고 하우스 와인을 한 잔씩 시켰는데, 만약 그가 이 대목에서 와인 리스트를 받아서 본인의 해박한 와인 지식을 자랑하기라도 했다면 방금 적립한 호감 대신 반감이 적립됐을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난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의 취향에 근거한다) 그는 굉장히 심플하게 고민할 여지도 없이 하우스 와인을 주문했고 그 적절함이 좋았다. 또 한 번의 호감 적립. 그렇다고 해서 소개팅 분위기가 급 반전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눴고, 약간의 취기가 오른지라 내 마음은 저울은 긍정에 가까웠다.
식사 후에 커피를 권하는 그에게 내가 근처 맥줏집에서 맥주 한 잔만 더 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을 했고, 다행히도 그는 흔쾌히 콜을 외쳤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남편도 그날 그 제안이 썩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서로에 대한 어색함을 지워갔다.
그 후로도 주선자에 대한 예의로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졌는데, 말복이라는 이유로 들깨 삼계탕을 먹으러 가서는 함께 나오는 인삼주를 들깨 삼계탕에 들이부으며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았다. 땀을 쭉 빼고 나오니 여름밤이 선선했고, 그게 너무 좋아서 캔맥주를 사 들고 산책을 했다. 그다음 만남에는 고풍스러운 한옥의 막걸릿집에서 각자 좋아하는 막걸리를 소개했고, 그다음은 시끄러운 곱창집에서 소맥을 마시며 딱 좋은 소맥 비율에 관해 이야기했고, 비 오는 어느 날엔 운치 있는 이자카야에서 사케에 꼬치를 잔뜩 먹기도 했고, 수제맥줏집에 가서는 맛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메뉴판에 있는 맥주를 하나씩 마셔보느라 둘이 11잔을 마신 적도 있다. 이렇게 데이트라기보다는 맛술탐방대에 가까운 만남을 가지면서, 우리 사이에 술잔이 하나둘 쌓였고 서로의 취향을 알게 되었고 약간의 취기는 서로를 솔직하게 대할 수 있는 팁도 되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결혼한 후에도 우리는 크게 싸운 적이 없는데 거기에도 술이 큰 몫을 했다. 우리는 서로 서운한 게 있으면 술을 시켜 놓고 술의 힘을 빌려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과하기도 하고 협의하기도 했다. 갈등이 생길 때면 술잔을 앞에 두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남자가 싫었다. 어린 시절 아빠가 술을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마셨고, 그때마다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기억 때문에 취해있는 남자는 물론 술을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상형의 요건 중 하나로 ‘술을 즐기지 않는 남자’를 꼽았다. 그런데 결국은 아빠 닮은 사람 만난 건가 싶어 가끔 헛웃음이 난다. 이런 이유로 그렇게 같이 술을 먹어놓고도 남편이 조금이라도 취한 모습을 보이는 날이면 배우자로서 적합한지 않은 것 같다며 그를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와 아빠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아빠에게 받은 트라우마와 그 프레임을 전혀 관계없는 그에게 씌우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할지의 문제였다. 술이 과하면 물론 안 되겠지만 적당한 술이 주는 힘을 믿는다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이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가치관이며 취향이며, 여가를 즐기는 방법까지. 초반에는 이렇게 공통점이 없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아니다. 우리는 평일 저녁 반주를 기울이는 것을 취미 삼아 도란도란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공통점이 있었다. 술.
얼마 전 우리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과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왔다. 15일 동안 매끼 술을 마셨다. 못해도 50잔 이상의 술을 마시고 왔을 텐데 돌아온 후에도 한잔 한잔 기억을 더듬으며 그랬지. 그때 그 잔은 이래서 좋았지. 한다. 우리에겐 한잔이 추억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살 것이다. 평일엔 반주하고 기념일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평생을 함께 살다 보면 우리도 큰소리를 내고 사네 못사네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 날에는 함께 나가 소주 한잔하며 타협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서로가 가장 좋은 술친구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