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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노래 Sep 19. 2021

술꾼과 그의 딸

지금 우리는 컴컴한 을지로 뒷골목을 헤매고 있다. 내가 듣기로는 여기 어디쯤 가맥집이 있다고 했는데 도통 찾기가 쉽지 않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하며 다 쓰러져가는 건물 계단을 몇 칸 올라가 보니 이게 웬일! 불이 훤히 켜져 있는 작은 방이 나왔고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목소리로 북적인다. 그 안엔 딱 보기에도 낡은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다. 에메랄드색으로 코팅된 것으로 그마저도 오래 사용해서 인지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 있었고, 의자는 포장마차에서 볼 법한 플라스틱 의자. 우리도 대충 남아있는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주문을 하려 해도 어째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없다. 이걸 어쩌나 곤란해하며 옆 테이블을 슬쩍 보니 술잔과 앞접시 등은 셀프인듯하고... 술과 안주는 어쩐단 말인가. 열심히 눈알만 굴려대고 있을 때,


“아 술은 밑에서 사 와야지!”

옆 테이블의 아저씨가 역정을 내는 건지 웃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한 톤으로 소리를 쳐서 살짝 주춤해 있는데,

“술은 밑에 내려가 슈퍼에서 사 오고! 슈퍼 아주머니한테 안주하나 해달라고 하믄돼! 껄껄껄”

호탕한 웃음을 덧붙이는 걸 보니 화가 나신 건 아니었나 보다. 얼핏 보아도 가맥집이 초보인듯한 우리를 위한 오지랖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삐그덕 거리는 녹슨 계단을 내려가 슈퍼에서 막걸리를 한 병 사고, 애호박전을 주문한다. 주인아주머니는 슈퍼 한편에 있는 가스버너에서 능숙하게 애호박전을 부쳐서 내어주신다. 다시 낡은 계단을 올라 테이블로 돌아오니, 아빠도 이런 풍경은 처음인지 미어캣처럼 허리를 세우고 연실 두리번거리고 있다.


아, 오늘의 동행자는 아빠이다. 오늘은 모처럼 아빠와 데이트를 하는 날이다. 거창하게 데이트라고는 했지만, 서울에서 만나 맛있는 술 한잔하는 정도이다. 내가 집을 나와 산지도 꽤 오래되었고 각자 사는 일이 바쁘다 보니 이렇게 둘이 마주하고 수다를 떠는 일은 연례행사 보다도 드문 일이다. 이렇게 한번 데이트를 하고 나면 당분간 아빠는 오늘의 만남을 술안주로 삼으며 행복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이 만남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게 신경 쓰는 편이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까 고민을 하다가 요즘 가장 힙하다는 을지로를 소개해주기로 한 것이다. 다 무너져가는 을지로 가맥집에서 만면에 행복한 티를 팍팍 내며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이렇게 친구 같은 부녀가 있을까 싶어 나도 따라 웃음이 난다.


“딱 한잔만 더 할까?”

달짝지근한 애호박전은 조금 남았는데 막걸리 한 병이 똑 떨어졌다. 이게 깔끔하게 똑 떨어져야 잘 마셨다 싶긴 한데, 한 병을 더 마시자니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아빠가 걱정된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셔”

“에이! 딱 한잔만 더 하자!”

그럼 그렇지, 어떤 술꾼이 이런 상황에서 술자리를 마무리할까.


아빠는 막걸리 한 병으로는 부족했는지 술을 더 마시자고 한다. 거절했지만 언성을 높여가며 한잔만 더 마시자는 모습을 보며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 버렸다. 웃어도 좋을 상황인데, 왜 나라는 인간은 스스로 기분을 망치려 하는 걸까.


열다섯의 나는 캄캄한 옷장 안에 쭈그리고 앉아 숨을 죽이고 아빠가 방에서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 잠든 동생을 미처 깨우지 못하고 혼자 숨어든지라 문 틈새로는 동생을 주시했다. 엄마는 지금쯤 추운 베란다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숨었을 테다. 이 처지가 서글퍼 눈물이 나왔지만 절대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들키면 안 되니까. 한참을 집 안 여기저기 살피던 아빠는 다들 어디 갔냐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기 분에 못 이겨 잠이든 모양이었다. 그제야 옷장 문을 열고 나와 숨어있는 엄마를 찾아내 나와도 좋다고 사인을 보냈다. 이게 우리 가족의 보통 밤이었다.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먹었고 술에 취하면 날이 샐 때까지 우리를 붙들고 신세 한탄을 하기 일쑤였다. 그 감정이 격해진 날에는 다 같이 죽자며 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집 아빠들은 술 취하면 만원, 오만 원씩 용돈을 턱턱 꺼내 줘서 아빠가 술 취해오는 날이 좋다던데. 나는 12시, 1시가 되어도 아빠가 들어오지 않으면 초긴장 상태로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아빠 일 하러 갔다 올게~”

하지만 아빠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지라 나는 자연스럽게 술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지나가다 술에 취한 아저씨만 봐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술자리에서 눈이 풀린 사람을 보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술이 싫은 만큼 아빠도 싫었는데, 앞서 말했듯 아빠는 다음 날이 되면 자상한 아빠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맘 편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괜찮은 척, 상처 받지 않은 척,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을 택했고 그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친구 같은 부녀로 술잔을 마주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술에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인데, 우습게도 술을 그렇게 싫어하던 나에게도 술꾼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저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흥겹게 어울리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취기가 오른 후 상대와 좀 더 솔직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아졌고, 일을 시작한 후로는 피곤한 날 수면제 대신 술 한잔을 하는 게 좋아져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이렇게 나의 일상에서 술은 필수 요소가 되어 갔고 그럴 때마다 ‘그때 아빠도 이런 마음으로 술을 마셨던 걸까?’라며 이해라는 걸 시도해보았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술을 마셔야 피로를 풀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술이라도 마셔야 견딜 수 있는 엄청난 하루를 보내고 왔던 걸지도 모른다고.


“에잇, 그래 한 잔 더하자! 대신 차 안 놓치게 빨리 마셔야 돼”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 시절 아빠가 가족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해묵은 상처를 뒤로해도 될 때인지도 모르겠다. 함께하는 한 잔에 미움과 설움을 조금씩 덜어낸다면 언젠가는 그 밤들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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