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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노래 Oct 20. 2021

육퇴의 맛

'육퇴'라는 단어는 내가 매일같이 쓰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단어가 갖는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육퇴'는 '육아 퇴근'의 줄임말로 근로자가 근무지에서 퇴근을 하듯 주 양육자가 육아로부터 퇴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는 사전적 의미만을 알 뿐이었다) 출산 전, 인스타그램에 왕왕 올라오는 #육퇴 #육퇴후한잔 이라는 피드들을 보며, 아니 육아가 그렇게 힘들다던데 육퇴 후에 쉬어야지 왜들 한잔을 하는 걸까, 한잔할 여유 정도는 있는 건가 등 정말 육퇴의 맛을 1도 모르는 생각만을 했더란다. 실제 인스타그램에 #육퇴후한잔 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글은 8만 개에 육박하는데... 도대체 육퇴가 뭐길래!


예고치 않게 임신을 하게 됐고, 예고치 않게 10개월간 단주를 시작했다. (금주는 아니고 잠시 쉬는 중이니 '단주'로 표현하고자 한다) 입덧으로 미슥거릴 때마다 시원한 맥주 한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그래도 엄마 될 사람으로서 애써 욕망을 잠재웠다.


- 내가 출산만 해봐라, 그동안 못 마신 술 다 마셔줄 테다!


출산하면 세상 모든 술을 다 마실 것처럼 굴었지만 출산 후 얼마간은 모유수유를 하기도 했고 몸조리를 하느라 술은 입에도 못 댔다. 결국 출산 후 80일경, 1년이라는 긴긴 단주를 마치게 되었다. 임신 기간 동안 다시 술을 먹게 되는 날에는 꼭 이걸 마셔야지, 아니 이걸 마셔야지 하며 적은 위시리스트가 계절에 따라 몇 번이고 바뀌었는데 막상 단주를 마친다고 생각하니 뭘 먹어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 진짜 끝내주는 조합으로 먹어야 하는데...


시원하게 맥주 한잔 벌컥벌컥하고 싶기도 하지만 소주 한잔 캬아~ 하면서 묵은 체증을 떨치고 싶기도 하고...  그냥 소맥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결국은 안주의 승리였다. 나의 선택은 과메기와 막걸리였다. 마침 과메기 철이었고 과메기에 막걸리는 또 양보하기 어려운 조합이었기에 긴긴 단주 후의 첫 잔은 막걸리가 채택되었고, 그때 그 막걸리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후로 나의 육아는 아이를 재운 후 마시는 술을 기다리는 참선의 시간과도 같았다. #육퇴후한잔 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물론 아이를 재우고 나면 나도 방전되어서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었지만, 드디어 찾아온 나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겨주고 싶었다. 그날 하루 수고한 나를 다독이는 행위와도 같다. 아쉽게도 하루종일 아이와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매일같이 고생했다고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는건 아니기에 셀프 위로를 하는 것이다. 뭐 그렇게 매일 위로를 받을 일이냐고 반문한다면 하루 종일 아이를 보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논문에 가까운 글을 적어낼 수 있겠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 생략한다. 그 때문인지 평소 술을 한잔도 못하던 친구도 육퇴 후에 한잔씩 하는 맥주의 맛을 알아버렸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퇴근 후 쉬고 있을 때 울리는 상사의 카톡처럼 아이가 예고 없이 빽-하고 울기도 하고, 육퇴에 곁들이고 싶어서 안주를 시켜두면 꼭 그날은 아이가 쉬이 잠들지 않는다. 결국 퉁퉁 불어 터진 떡볶이나 차갑게 식은 양꼬치 등이 나를 마주하는데 그래도 술맛은 꿀맛이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아이 친구 엄마들이 모였다. 오전 11시경 모이기로 한지라 아침 일찍 편의점에 가 맥주를 쟁여왔다. 유아차에 아이를 태우고 짐칸에 맥주 12캔을 싣고 등원시키는 엄마들 사이를 지나쳐오는데 은근한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육아 화이팅입니다. 육퇴 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은근한 시선들. 모두들 육퇴 하시고 맛있는 휴식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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