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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노래 Oct 01. 2021

그 자취방의 호화스러운 술상

그런 날이 있다.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이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잠들기 좋게 딱 한두 잔만 하고 싶은 날. 보통은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맥주 한 캔을 하지만 그날따라 왠지 혼자 마시기는 싫은 그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업무 미팅차 저녁 식사가 있었지만, 술 한잔 못 얻어먹은 날. 업무시간 후에 일과 관계된 자리를 갖는다는 것부터가 싫었는데 그래도 공짜 밥에 공짜 술을 먹을 수 있다며 겨우 좋게좋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술을 권하지 않았고, 장장 세시간 여를 술도 없이 억지웃음으로 보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도 덜도 말고 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저녁 내 변변찮은 음료를 마셨기에 찾아오는 괜한 갈증 같은 거였다. 오늘 하루 이렇게 고생한 나에게 맥주 한 잔 정도는 선물하고 싶었다.


이럴 때 떠오르는 친구가 있는데,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자취하는 친구로 동네에서 한잔하기에 딱 좋은 친구다. 십여 년 자취를 하면서도 동네에서 가볍게 술 한잔할 친구가 없어 늘 아쉬웠는데 얼마 전 가까이로 이사를 와 드디어 자취생활의 낭만 중 하나를 실현할 수 있게 됐다. 요 며칠 전에는 연이은 야근으로 술 마실 여유는 좀처럼 나지 않고 그럴수록 술 생각은 절실해져 갔는데 몇 시고 괜찮으니 퇴근하면 오라는 문자에 괜히 찡- 감동하고 밤 11시에 퇴근하고 찾아간 적도 있었다.


오늘도 그 친구를 떠올리고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자니?”라고 카톡을 보냈지만 바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사실 이 친구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애주가로 보통 오늘처럼 내가 게릴라 연락을 했을 때는 이미 만취이거나 다른 술 약속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오지 않는 답장으로 유추해보건데 지금도 술술술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SNS 계정을 보니 30분 전에 올라온 게시물. 오늘은 곱창전골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혼자 집에서 캔맥주나 마셔야겠다며 편의점에 들어서는 찰나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술을 좀 마시고 이제 막 집에 들어왔는데 괜찮다고. 오라고.


세 개에 만원하는 맥주를 사서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 참 쿨하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목이 마른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맥주를 마시자는데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흔쾌히 문을 열어줬다. 게다가 정말 맥주 딱 한 캔만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바지런히 냉장고와 싱크대를 오가며 안주들을 내어 근사하게 술상을 차려줬다. 마른안주들과 치즈, 형형색색의 과일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고기 구워줄까?” “김부각 먹어볼래?”라며 코딱지만 한 원룸 안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애당초 원룸 냉장고에 소고기가 왜 있다는 말인가.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술상을 두고 마주 앉아 500ml짜리 캔 맥주를 홀짝대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다 보니 이 녀석 ‘응... 그랬구나...’라며 반사적으로 리액션은 하고 있는데 눈이 반쯤 감겨있다. 술깨나 먹고 들어왔던 모양이다. 이렇게 피곤했으면 피곤하다고 내일 오라고 할 것이지 왜 흔쾌히 오라고 한 건지 괜스레 미안해졌다. 거절하지 못하는 건 어째 나와 닮았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아낌없이 자신의 한켠을 내어주는 모습은 내가 갖지 못한 따뜻함이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분명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또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나누며 자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복’이라는 단어가 살림살이의 넉넉함만을 이야기한다면 유복하지 않게 자라왔을 친구인 걸 알지만, 그 단어가 복의 있고 없음을 뜻할 수 있다면 분명 유복(有福)하게 자랐을 친구.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진부한 이야기가 떠올라 혼자 웃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더 놀다 가라는 친구의 뜻 모를 만류에도 서둘러 코트를 여미고 그 자취방을 나섰다. 날이 꽤 쌀쌀해 코가 시려왔지만 마음 한구석은 괜히 든든했다. 내가 이 자취방을 찾았던건 그저 혼술하기 싫은 날이어서, 그저 우리집과 가까워서라는 뻔한 이유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늘 술을 핑계 삼긴 했지만 이 친구에게서 받는 따뜻함으로 하루의 피로를 조금, 일로 지쳐 굳어버린 마음을 조금, 녹여내며 위로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과 지내는 날들이 쌓이면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런지 생각해보며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가방을 던졌다. 내동댕이 쳐진 가방은 입을 턱 벌렸고, 내 눈에 들어온 건 한라봉과 김부각. 30분 전 배가 부르다며 내가 한사코 거절했던 안주였다. 굳이나 이걸 또 챙겨주겠다고 꾸역꾸역 넣어둔거니. “야이씨 뭐 이런걸 넣어놨어!” 라고 메시지를 쓰다가 좀 더 솔직해지자 싶어 나답지 않은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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