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워낙에 술이 약하기 때문에 술을 마셨다하면 취하는 편이다. 아, 분명히 해두자면 여기서 취했다는 표현은 어떤 부분이든 평소와 달라지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거나 더 크게 웃는다거나 수저를 떨어뜨리는 횟수가 늘어난다거나. 내가 생각하는 취함이란 이 정도이고, 나는 취하는걸 꺼려하지 않는다. 다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주사를 꺼릴뿐. 무튼, 나는 술을 마셨다하면 취하는데 정말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기이한 경험을 몇번 했다.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좋은 공기에서 술을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갓집>
서울 근처에서 오래사시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시골로 이사를 가겠다고 선포하셨다. 이제 한적한 시골에서 작은 밭이나 가꾸며 여유롭게 살고 싶으시다는 것. 그런 연유로 내가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시골집’이 생겼다. 어릴 때 명절만 되면 ‘시골집’이라는 구수하고도 따뜻한 어감을 가진 곳에 다녀오던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나에게도 시골집이 생긴 것이다. 특히나 손재주가 좋은 두분 덕에 그 곳은 제법 로망 속 시골집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집채 앞 쪽으로 너른 앞마당과 작은 텃밭이 있었고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뛰어다녔다. 앞 마당에는 그늘막 파라솔 테이블을 가져다 놓으셨고, 그 옆에는 가마솥이 있어 고기를 구워먹기에 딱이었다. (기승전고기?)
그토록 바랐건만 일이 바쁘기도 했고 전남 어드메로 거리도 꽤 있어서 시골집에 한번 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날은 모처럼 우리 가족이 다같이 외갓집을 찾은 날이었다. 그게 좋으셨던 외할머니는 마당에 불을 피우고 가마솥 뚜껑에 삼겹살을 구워주셨다. 텃밭에서 쌈채소를 뜯고, 단단한 고추를 꺾고, 대충 씻어 고기에 곁들였다. 인근에 다른 집이 없어 해가 지면서 사방이 깜깜한 암흑이 되었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쌀독에서 쌀이 쏟아진듯 별들이 자잘자잘 펼쳐져있었다. 외할머니는 또 하나의 가마솥에 딸기를 한솥 가득 넣고 설탕을 넣어 쉼새없이 저어가며 딸기잼을 만들고 계셨다. 그 곁에 둘러앉으니 캠프파이어 같기도 하고, 제법 훈훈하기도 했다. 달달한 딸기잼향은 또 어떻고. 가족들과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며 소주와 맥주를 들이켰는데 이상하게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마셔도 마셔도 별빛에 취하면 취할까 술에는 취하지 않았다. 지금도 좋은 꿈을 꾼 것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면이다.
<다이스트립>
나에게는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다. 친구이지만 우리는 나이가 같지 않고 성별도 같지 않다. 하는 일도 다르고 누군가는 기혼자, 누군가는 미혼이자 싱글이다. 하지만 이 모임에 대한 애정만은 각별하다. 이 모임의 이름은 ‘다이스트립(DiceTrip)’인데 단어 그대로 주사위여행, 주사위를 이용해서 여행을 하는 모임이다. 여행과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재밌는 일을 해보자고 만든 모임으로 여행 목적지를 정하거나 그 외 의사결정을 할 때 주사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첫 여행은 조금 무모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출입구 중 하나인 양재에서 만나 무작정 주사위를 던졌다. 그리고 주사위가 보여주는 숫자에 km를 붙여 그만큼 이동을 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40분을 이동해도 같은 동네를 맴돌았는데 그것마저 재밌다며 웃었던 긍정적인 사람들. 이건 아니다 싶어 주사위가 보여주는 숫자에 10km를 곱하는 방식으로 충남에 접어들었고,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 근처 식당 여섯 곳을 선정해 주사위를 던져 방문하기도 하고. 분신사바하듯 모든 의사결정을 주사위에 맡겼다. 그렇게 몇차례의 여행을 지나왔는데, 이들과의 술자리에는 늘 좋은 공기가 함께했다. 주사위의 신이 좋은 공기로 이끌어준 덕에 늘 피톤치드 뿜뿜한 숙소에서 술판을 벌일 수 있었다. 좋은 공기에 좋은 고기와 좋은 술, 좋은 노래가 함께하다보면 훌쩍 자정을 넘기고 새벽이 왔다. 그간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이지 못하고 있는데 언제든 주사위의 신이 우리를 모아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