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노래 Sep 30. 2021

치즈케이크와 포트와인

- 극강의 달콤함에 대하여

대낮의 리스본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는데 마침 해도 너무 좋은 날이었다. 점심 식사는 무얼 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포르투갈은 먹킷리스트가 특히 많았다. 해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문어밥은 꼭 먹어한다, 아니다 바칼라우를 먹어야 한다, 소꼬리찜을 먹어야 한다. 먹어야 하는 음식이 많기도 했지만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새로운 음식도 이제 지겨워졌다. 그날은 다 아는 맛이어도 괜찮으니 수제버거를 먹고 싶었다. (갑자기?) 폭신한 번과 지글지글 구워져 나온 패티의 조합. 만국 어딜가도 맛의 편차가 크지 않을 법한 그런 뻔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한적한 골목에 있는 수제버거집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 내가 어떤 가게에 들어갈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적대적인 눈빛으로 보면 그곳은 맛집이라고. 관광객들이 빈번히 오는 식당이 아닌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이기에 이방인을 본듯한 눈빛을 보낼 거라고. 그곳이 그랬다. 묵직하고 키가 큰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문만큼 높은 천고에 빨간 벽돌, 듬성듬성하게 배관과 전선이 드러난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어디 브루클린이 생각날 법했다. (브루클린에 가본 적은 없다. 어린시절 가십걸을 통해 받은 느낌적 느낌일뿐) 내부에는 두어 테이블에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큰 창 옆으로 앉았다. 일단 익숙하게 시원한 맥주를 시켰고 버거 하나를 뚝딱했다. 버거는 역시 내가 잘 아는 맛이었는데 여기가 이태원인지 리스본인지 모를 그런 맛이었다. 덕분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이걸 원했던 거였다.


버거를 다 먹고 나서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빛도 좋았거니와 붐비지 않는 가게도 마음에 들었다. 식사 후에 급한 스케줄도 없어 진득하게 앉아있고 싶었다. 그냥 앉아있기는 조금 그렇고, 커피를 시킬까? 맥주를 한잔 더 시킬까? 고민하며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식사 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디저트 메뉴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반가웠다. 사실 나는 술만큼 케이크이나 무스 같은 디저트도 좋아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이렇다 할 디저트를 먹지 못해 내심 서운해있었다. 디저트 전문점은 아닌지라 서너 개의 후식 디저트가 있었고, 그 중 치즈케이크를 고르고 나니 치즈케이크에 맥주는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아 포트와인을 한잔 주문했다. 치즈와 와인은 실패하지 않는 조합이니까.


기다란 바 형태로 위에 붉은 라즈베리 시럽이 잔뜩 올라간 치즈케이크, 그리고 와인 한잔이 나왔다. 서로 붉은색을 뽐내기라도 하듯 잔뜩 붉은빛이었다. 나는 선술-후안주파인지라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가 삼켰다. 포트와인의 진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실로 혀끝이 아릴정도로 달았다. 그리고 포크를 들어 치즈케이크의 한쪽 끝을 떼어내 입 안에 넣었다. 새콤한 치즈향이 진득하게 입안에 가득찼다. 역시 치즈와 와인은 실패 없는 조합이었다. 사실 포트와인처럼 달달한 와인에는 씁쓸하고 짠 종류의 치즈가 찰떡궁합이라고 하나, 단 것에 미친 나에게는 새콤달콤한 치즈케이크와 그걸 뛰어 넘는 더 달콤함의 포트와인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이면 절레절레할 궁극의 달콤함이었다. 


그 순간 달콤한 건 와인과 케이크뿐은 아니었다. 내 상황이야말로 굉장히 달콤했다. 나는 사회초년생 때부터 9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났다. 9년을 다녔다지만 일한 시간을 따져보면 15년은 족히 일했을 회사. (대충 그만큼 많이 일했다는 뜻이다) 늘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살았고 특히 힘든 날이면 퇴근하고 소주를 마시며 우울감을 해소해야했던 회사. 그때 마셨던 소주는 참 썼는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마시는 와인은 포트와인이 아니래도 달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잔을 먹다 보니 내 볼도 치즈케이크 위의 라즈베리 시럽처럼 붉어져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대낮에 얼굴이 벌게져 엎어져 있는 모습이라니 맘껏 흐트러질 수 있다는 것조차 행복했다. 이제 어디를 여행해도 급한 업무라며 내일까지 처리해달라는 클라이언트도 없고, 갑자기 사고가 터졌는데 어떡하면 좋냐는 부사수도 없다. 이렇게 취해도 된다는 뜻이다. 내일 돌아가야 할 직장이 없다니 이보다 달콤한 기분이 있을까. 얼마나 바라왔던 '흐트러짐'인가. 그 사실이 행복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을 엎드려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마저 이 달달함에 동조하고 있었다. 나의 큰 창과 골목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건너편 카페의 야외에 설치된 테이블이었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하얀 테이블보가 길게 내려와있는 테이블. 한 테이블은 흰머리에 허리가 굽었지만 단정하게 투피스를 차려입은 할머니 두 분이 차지하고 커피를 마시고 계셨다. 또 한 테이블은 중년의 아저씨 둘이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다정함과 스킨십의 밀도로 미루어보아 연인으로 추정되었다. 그 두 풍경이 참 별거아니면서도 한국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이상적인 풍경인지라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의 풍경은 당분간 내가 굉장히 사랑하는 장면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지친다 싶을 때 슬쩍 꺼내보면서 마음을 다잡을 장면이 될 것이다.


너무 행복할 때 이 행복에 데코레이션을 한 줌 더 얹고 싶을 때, 그럴 때 포트와인과 치즈케이크를 먹어보자. 궁극의 달콤함이 당신을 감싸게 될 테니.

이전 08화 좋은 공기에는 취하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