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노래 Oct 12. 2021

꼬치와 사케

당신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음식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어떤 음식을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추억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선배 A는 감자탕과 소주의 조합을 보면 이십대 초반 어느날 이별한 남자가 생각난다고 했고 친구 B는 치킨과 맥주의 조합을 보면 고등학생 때 짝사랑 했던 대학생 과외 선생님이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꼬치요리를 보면 그녀가 떠오른다. 먼저 그녀에 대해 소개하자면 일단 술을 잘 마셨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서면 착석과 동시에 “일단 생맥주 한 잔 주세요”를 외치며 시원하게 한 잔을 비우고 시작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만큼이나 쌈박한 사람이었는데,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솔직한 타입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 덕분인지 늘 웃는 얼굴이었고 주변에는 사람이 많아 약속이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나와는 180도 다른 캐릭터였다. MBTI로 말하자면 그녀는 초 E형 인간일 것.


그녀와 나의 인연은 고치(高知)라는 일본의 작은 소도시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한국을 떠나 부모님의 간섭 없는 삐까번쩍한 도시로의 탈출을 꿈꿨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서 도쿄(東京)나 오사카(大阪) 같은 대도시에 있는 학교는 번번이 탈락하고 이 생소한 지역에 끌려오듯 발을 디뎠다. 이제 와 말하지만, 일본인들조차 평생 가볼까말까 하다는 작은 시골 동네의 풍경을 보는 순간 절망적이었고 시작부터 우울함이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잔뜩 기대하며 싱글벙글한 얼굴로 잘 지내보자고 인사를 건네는 그녀. 마침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여서인지 그녀의 세상만 빛나고 있었다.(쓰고보니 첫눈에 반한 스토리처럼 진부하고 느끼하지만 정말 그랬다) 그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해 자주 찾던 술집 가운데에서도 잊고 싶지 않은 가게가 하나 있다.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학교 정문을 나와 낮은 담벼락을 따라 가다보면 대각선 방향으로 작은 기차역이 보인다. 기차가 다니니 기차역인줄 알았지 통나무로 지어진 펜션 관리동 같은 모습이다.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이미 간이역이 되고 없어졌을 작은 역으로 역사 안에는 매표 창구가 하나 있을 뿐이고, 그 너머로는 기차 노선이 두 개 뿐인 소박한 모습을 하고있다. 다시 역 앞으로 나오면 맞은 편에 자욱한 연기를 내뿜고 있는 가게가 보인다. 빨간 간판에 검은색으로 大吉(다이키치)이라는 한자가 크게 쓰여 있는 꼬칫집으로 이 가게가 영업을 준비하면 그 근방이 꼬치 굽는 연기로 가득했다. 역과 꼬칫집 사이로는 낡은 트램(거기에서는 노면전차라는 다소 촌스럽지만 더 어울리는 표현을 썼다)이 지나다닌다. 이 동네에 일본스럽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가게는 특히나 일본스러운 정취를 담고 있었다.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긴다. 직접 숯불에 꼬치를 구우시는데, 두건을 두르고 있는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다. 엄청난 사명을 다하는듯 집중해서 꼬치를 굽다가도 손님이 드나들면 꼭 쳐다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신다. 여러 번 만나 안면을 익혔는데도 꾸준히 존댓말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이 집 할아버지만의 매력이다. 


이 집에 오면 일단 꼬치를 시킨다. 꼬치 외에 다른 메뉴는 할아버지에 대한 배신 같다. 내가 좋아하는 꼬치는 염통이나 연골처럼 꼬돌꼬돌 씹는 맛이 있는 부속 부위이고, 나중에 가서는 토마토나 버섯같은 야채를 꼭 두어개 추가했다. 꼬치에는 시원한 생맥도 어울리지만 어쩐지 할아버지가 애써 입힌 숯불향이 날아가는 것 같아 느긋이 즐길수 있는 사케를 선택한다. 더운날은 얼음을 넣어 마시기도 하고, 쌀쌀한 날에는 아츠캉(도쿠리에 사케를 넣어 따뜻하게 데운것)으로 마시기도 한다. 사케는 주로 할아버지에게 추천을 받아 이 지역의 사케를 마시곤 한다. 


이 집은 주로 그녀와 단 둘이 오곤 한다. 오늘은 어디서 술을 마실지 고민할 때, 내 나름의 철학이 있었는데 이 집은 절대 여럿이 오지 않는다, 절대 들떠있을 때 오지 않는다는 철칙이 적용됐다. 즉 뭔가 고민이 있거나 대화가 필요할 때 소수의 누군가를 대동해서 오는 곳으로 그 상대는 주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고민도 하찮다는 듯이 가볍게 여겼고, 앞뒤없이 객관적으로 직언을 해줬고, 그러면서도 연실 웃는 사람이었다. 사랑 고백 같지만 한 집에 살면서도 그녀의 미소를 보면 모든 피로가 날아가는 그런 재주가 있었기에 어쩐지 지친 날이면 이 친구와 그 가게를 찾았다. 그 무렵 내가 어떤 고민들을 하며 살았는지는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은 뭔가 지쳐있었고 그래서 술 한잔을 하러 그 가게에 들렀다. 그날따라 사케 한 병을 똑 하고 비웠다. 한 병을 더 시켜 먹었다. 둘이서 와인병만 한 사케를 1병씩 나눠마셨더니 주량에 딱 맞은 것 같아 입가심으로 맥주 한잔씩을 더하고 나왔다. 할아버지 사장님은 우리를 보며 역시 한국 여성들 주량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워주셨고 그 후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사케를 추천해주셨다.


얼마 전 일본에 출장 갈 일이 있었다. 업무 미팅을 마치고 저녁 시간이 되어 혼자 호텔 근처에 있는 꼬칫집으로 갔다. 바에 앉아 꼬치 몇 가지와 사케를 온더락으로 시켜 마시고 있노라니 그때의 기억은 진하게 나지만 그 맛에는 한참 못 따라오는 듯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 년에 두세 번, 그러다 일 년에 한번. 조금 드물기는 해도 주기적으로 그녀를 만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꼬치에 사케를 선택했다. 나도 그녀도 그때 그 추억의 맛을 진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그 친구가 출산하고 반년이 흘렀는데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아직 찾아가 보지도 못했다. 모유 수유가 끝나는 날 같이 꼬치에 사케 한잔 하자고 연락 해봐야겠다.

이전 10화 아구찜과 청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