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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Feb 16. 2021

부레옥잠과 개구리

개구리는 누구지.

사망 사유는 다양하다. 사고사, 추락사, 자연사 등. 자살사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영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 그 가해자가 피해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영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사람들은 더 파고 들고자 한다. 


“그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이가 어린 관계로 내 주변엔 그런 사람이 많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내 관계망 속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10대, 20대, 때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 과몰입하지 말라는데 내 성격상 나도 죽고싶다든지 하는 생각은 안한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정적 과몰입은 하지 않지만 생각은 많이 한다. 소결론은 단정은 금물이라는 것. ㅇㅇ때문에 그랬다, ㅇㅇ때문에 라는 말은 정말 폭력적이다. 그 선택이 특별히 고귀하다거나 미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삶을 스스로 접어내는 데는 그 삶 전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선택은 곧 그 사람의 삶을 요약도 아니고, 모두 담고 있을 것이다. 단정은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해버리는 일이다. 얼마전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친구의 졸업작품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생각을 그려봤다. 


세상이 물이 가득 찬 수조라고 할 때 그런 사람들이 있다. 수면에 그저 드러누워 떠다니는 사람들. 언뜻 자유나 희열이 그들을 채운듯 해보이나 그들은 철저히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부력은 밀도의 문제다. 밀도가 클수록 가라앉는다. 공기를 품은 풍선은 물에 뜬다. 말이 공기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도 같다. 기쁨이고, 희열이고, 슬픔이고 미련이고 모두 싹 빠져나갔다. 불안도 아니다. 불안이 찬 사람들은 이 수조바닥 어딘가에 발을 디딛고 서있을 것이다. 그들은 가끔 하늘과 구름으로 덮힌 수면을 바라보며 자신들도 자유로이 떠다니고 싶다고 생각은 해본다. 그러나 한 발자국 뛰어볼지 언정 발은 완전히 떼지 못한다. 불안은 한 편으로 무언가를 향한 목적의식에서 비롯되기도 하므로. 


 자유를 동경하는 이에게 자유는 없으나 자유조차 갈망하지 않는 이에게 자유가 있다.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이 곳 저 곳 유영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뿌리 박힌 곳이 없는 부레옥잠이 물 밑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연꽃보다 위태롭더라도 자유로울 것이다.


 부레옥잠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점점 내 곁에 많아지는 듯 하다. 그들도 이전에는 땅에 발을 묶어둔 채, 목적, 미련으로 몸을 가득 채운 채 낮게 낮게 수조바닥 어딘가를 걸어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목적, 미련 이외에 수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어느샌가 감당하기 힘들어졌나보다. 누군가의 잽싼 발걸음에 밟히지 않을까, 물의 수압이 갑자기 자기 몸을 터트려버리지 않을까, 그게 두려웠던 너는 그런 식으로 자유를 찾고 싶었겠지. 


부레옥잠이나, 뒤집어진 채 배만 동동 떠다니는 붕어처럼 차라리 그게 낫다고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느꼈을까. 


여전히 나는 모른다. 대강의 지론을 이미지로 캡쳐해 볼 뿐이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무슨 선택이든 네가 그 거대한 결단을 내리기 이전에 나에게도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무용한 미련이 네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나도 느꼈고, 봤을 것이다. 너희들 대부분은 자유를 원해서가 아니라 도피를 위해 자유를 차선책으로 여긴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발이 떼어질 때 한번쯤은 나도 뛰어올라서 잡아내 착지할 수 있었다. 이 확신 하나때문에 나는 무지해도 과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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