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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Nov 18. 2024

김장

어설픈 전원생활

들판이 갈색으로 변하자 하루 종일 바람이 분다. 가을을 시샘하는지 바람은 크리스마스 오브제처럼 어여쁜 붉은 화살나무 잎들을 흔들어놓았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잎 떨군 앙상한 가지는 이미 겨울을 안았다. 나도 슬슬 한 해를 정리하며 겨울 맞을 준비를 한다. 미련 없이 모든 잎들을 땅으로 보내버린 가벼워진 화살나무를 닮고 싶다.

-팔월 말에 김장 배추를 심다-

양력 팔월 중순쯤이면 농부들은 김장 배추를 심었다. 너무나 더웠던 올여름은 늦도록 기승을 부리는 더위로 농부들조차 김장 배추를 심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했다. 해마다 하던 데로  팔월 중순에 배추 모종을 심은 농부들 중엔 배추 모종이 타버린 집들이 수두룩했다. 눈치를 보던 중 우리 집은 예상보다 일주일 늦게 심기로 결정했다.

배추 모종을 사러 집 근처 단골 육묘장에 갔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모종 60개를 사천 원에 가져가라고 했다. 100개의 모종판 중에 누군가 사고 남은 것인듯했다. 예상보다 모종을 후하게 사서 신이 나 돌아와 남편과 아옹다옹하며 배추 모종을 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추 60포기를 거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까만 멀칭 위에 초록 나비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양새에 흡족했다. 모종을 심자마자 비까지 내린다. 텃밭에 작물을 심은 후 비가 오는 것처럼 운수 좋은 일은 없다. 올 배추 농사가 잘 되려나 보다.


-뙤약볕에도 굳건히 자란 배추-

배춧값이 고공행진 중에도 기특하게도 우리 집 배추 모종은 여느 배추 농부 못지않게 근사하게 자라주었다. 먹을거리를 장만하며 생기는 뿌듯한 마음은 나 같은 초보 농부에게도 있다. 작은 씨앗이, 여린 모종이, 땅과 함께 이루어내는 대 장정의 서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곡식을 거두며 한결같이 '기특하다'와 '감사하다'라는 마음이  든다. 가끔은 자연의 이치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일주일마다 시골에 들어가며 물을 주기도 하고 벌레 약도 주었다. 조그만 할 때 두어 번 비료도 주었다. 배추는 갈 때마다 점점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연둣빛이 초록빛으로, 초록빛이 깊은 바다색으로 변하며 배추가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는 듯 성장했다. 뿌린 작물들은 하늘의 도움 없이는 결실을 맺을 수 없음을 모든 농부들은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잘 자라준 배추를 보며  또다시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다. 배추 한 포기에 2만 원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우리는 조용히 으스대며 매주 배추를 보러 가는 기쁨을 누렸다.


-김장 준비, 마음 준비-

겨울을 준비하는 것 중에 가장 큰일은 김장이다. 이번엔 배추 농사가 대풍이지만 밭에서부터 김치냉장고로 들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요 며칠 동안 김장할 일이 걱정되었다. 배추를 괜히 많이 심었나 하는 후회도 올라왔다. 급기야 김장을 하기로 한 날이 내일로 다가오자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지금껏 나의 생활신조이다. 그 계기는 젊디젊은 시절, 이사를 다니면서 생겼다. 이사를 해야 하는 날에 남편이 외국에 있거나 허리가 아파 도와주지 못할 사정이 생겨도 이사는 마무리되곤 했다. 새 집으로 들어가 첫날밤을 보내며 생각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며 고된 과정은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을. 아마 이번 김장도 그런 맘으로 치르면 될 것이다.


-김장과 함께 떠오른 이야기-

요 몇 년 동안 나는 절임배추를 주문해 김장을 하곤 했다. 김장할 때 제일 힘든 것이 절이고 씻는 일인데 덕분에 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김장 속 재료만 만들어 버무리면 끝이 나곤 했다. 김장이 뭐가 힘드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처럼 밭에서 뽑은 배추로 김장을 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그것도 60포기씩이나 겁 없이. 해마다 100포기 넘게 김장을 담갔던 어머니의 고됨이 떠올랐다. 철부지였던 나는 멋모르고 김장판을 뛰어다니며 쌈을 얻어먹고, 소고기 배추 된장국에 갓 지은 밥을 말아 맛있게 먹곤 했다. 그 시절 먹었던 맛은 지금 아무리 흉내를 내려 해도 도대체 재현할 수가 없다. 잿밥에만 눈이 멀었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김장 작업 개시-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 잘 자란 배추가 얼어버릴까 싶어 배추 위에 포대를 덮어 놓았다. 강원도의 날씨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다행히도 그동안 날씨가 따듯했다. 이제 근사하게 자란 배추는 우리들의 겨울 먹을거리를 위해 변신할 차례다.

드디어 D-Day, 김장을 하러 식구들이 오고 있다. 먼저 시골로 들어온 우리 부부는 식구들이 오기 전 배추를 다듬어 놓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할 일은 배추를 뽑고 뻣뻣한 겉 잎을 떼어내는 일이다. 손질을 마친 배추는 시장에서 파는 상품성 있는 배추로 변신했다. 이 뿌듯함이란! 갓난아기 안듯 양팔에 안아도 보았다. 속이 알맞게 들어차서 폭신폭신했다. 속이 꽉 들어찬 배추보다 이런 배추가 더 고소하고 맛있다. 여기에 더하여 올해 배추는 우리 가족의 흐뭇한 눈길을 받으며 자란 것이니 만큼 맛은 이미 보장되어 있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다음 할 일은 배추를 먹기 좋게 네 조각으로 나누는 일이다. 수줍게  배추 속살이 드러났다. 밝게 빛나는 샛노란 색! 어떤 황금색이 이보다 빛날까! 자연에서 온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땅 위에 직접 농사를 지은 사람들만이 안다. 농부들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수만 가지 색들은 그 어떤 화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쩜 이리도 예쁠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임에도 넋을 놓고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는 배추의 노란 속을 넋늫고 들여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추 오십 포기는 200조각으로 나누어졌다. 오늘과 낼, 나는 이제 죽어났다.

-훌륭한 간잽이가 맛있는 김장을 만든다-

다음은 배추를 절이는 일이다. 훌륭한 간잽이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듯 김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적절한 간을 유지하도록 배추를 절이는 일이다. 내일 정오쯤 양념을 버무리기로 했으니 밤새 배추를 절이면 될 것이다. 모든 것엔 때가 있듯 김장도 순서를 잘 지켜야만 맛을 낼 수 있다. 김장이 힘이 드는 이유는 일단 시작되면 끝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무리가 될 때까지 쉴 수 없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손과 발이, 어깨와 팔이 빠질듯해도, 마무리를 해야 하는 것이 김장이다. 마치 진통이 시작된 여자가 아기를 낳아야만 끝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배추를 절이려면 소금의 농도가 중요한데 이번에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바닷가로 바캉스를 갔을 때 자맥질하며 마신 바닷물 농도라는 거. 딸들에게도 말해주리라."너 어릴 적 엄마랑 바다에 놀러 가던 거 기억하지? 바닷물이 얼마나 짠지도 기억할 거야. 바로 김장 배추를 절이는데 필요한 소금 농도가 그것과 똑같더라. 뭐 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김장 배추를 절일 때는 어릴 적 바닷가의 추억만 꺼내면 돼. 어때 참 쉽지!"


염도계로 짠맛을 가늠하는 것이 공장식 김치 라면 우리 집 염도계는 어딘지 모르게 몸 구석구석에 들어있는 육감이지 않을까.


김장 담그는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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