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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부사수의 퇴사

광고회사 인력 운영의 근간은 도제식이다. 사수-부사수가 한 쌍이다. 현업에 대해 사수가 부사수에게   맨투맨으로 지시하거나 알려주며 일이 돌아간다. 그러다보니 누가 내 파트너가 되는지가 그 사람의 행복지수 대부분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클라이언트도 여간 까다로운데 사수까지 인성에 문제있다면 솔직히 광고회사 다니는 게 죽을 맛이다. 내가 주로 부사수였던 어린 연차 때는 이 시스템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사수가 어떤 부분을 혼내면 더이상 혼나지 않도록 개선의 정을 보이면 그만이었다. 열심히 따라가면 그냥 내 몫을 다 한 것. 그런데 연차가 거듭되고 사수의 포지션에 익숙해지니 그 전과는 다른 게 보였다. 함께 일하는 부사수의 모습이 나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안 좋은 모습은 내 안 좋은 행동의 결과와도 같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게 본업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들의 감정상태가 좋다는 건 내가 잘 하고 있는 거고 그들 상태가 안 좋다는 건 내가 잘 못하고 있다는 증거 같으니까. 진심으로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솔직히 나를 안 좋게 보는 걸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다보니 유독 짧은 만남으로 끝난 친구들이 마음의 못처럼 박혀있다.


첫 번째 친구는 못이라기 보다는 도끼였다. 전에 일했던 사수와 합이 맞지 않는다며 내게 SOS를 쳤다. 난 그를 흥분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나랑 일하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한 넉 달을 일했을까. 그가 설 연휴를 마치고 와서 얘기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이 나오면 백발백중 퇴사각이다. 성실했던 친구고 나름 합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도끼가 되어 내 발등을 찍었다. 호감으로 시작했다가 이별로 끝난 어느 진부한 스토리. 한 종편 채널의 마케팅 담당을 하러 떠났다. 좋은 기회라고 봤기에 짧은 아쉬움은 뒤로 한 채 양껏 응원해주며 보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친구는 연타석 퇴사였다. 두 번째 친구는 디지털 팀에 아르바이트로 들어와 그 실력을 인정받고 정직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AE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 우리 팀에 지원했다고 했다. 소문대로 일을 괜찮게 하는 친구였고 특별한 트러블은 없었다. 다만 그런 고민은 있었다. AE를 하러 온 친구였는데 디지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다보니 디지털 중심으로 일이 편성됐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지인들과 스타트업을 차린다고 했다. 내가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자책하게 되었다.


세 번째 친구 또한 비슷한 경험이었다.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며 이타성까지 갖춘 보기드문 캐릭터였다. 얘기를 들어보면 그 전 직장에서는 여기보다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았던 것 같다. 사수 의존적이기 보다는, 비중있는 업무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가며 존재의 이유를 보여주는 스타일이었다. 미안하게도, 그 친구에게 연차 이상의 업무에 대한 주도권을 줄 수 없었다. 그 업무는 내 역할이고 그 친구에게 그걸 맡기는 건 일을 미루는 거라 생각 했으니까. 그냥 눈 딱 깜고 프로젝트 하나 턱 하니 안겨줄걸. 그 친구도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욕이 안 생긴다는 이유로 퇴사를 했다. 


왜 떠날까. 뭐가 문제였을까. 결국 그 고민은 돌고돌고돌아 “일만 하고 싶다”는 예전 사수의 말로 향했다. 연차가 쌓일 수록 내 일만 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사람 관리까지 잘해야 된다. 관리에 정답은 없다.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부사수에게 제시할 수 밖에. 그밖의 노력이라면 뻔뻔해 지는 노력이다. 부사수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앞에서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시종일관 쿨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따뜻하되, 그 이상 따뜻해 질 필요는 없다. 그래야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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