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낸 이야기는 대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한다. 이야기가 발아되던 날의 습도, 차창을 통과해서 눈을 시리게 하던 볕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딸각! 7월 15일에 출간된 <군산>은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이야기의 싹이 텄다. 지난해 10월초, ‘대한민국 도슨트’ 집필의뢰서와 소개 파일이 이메일로 왔다.
“안녕하세요. 북이십일 출판사 지역콘텐츠 팀입니다. 저희는 한국 각 지역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팀으로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를 출간 중입니다.”
북이십일 출판사 편집자들은 군산에 사는 작가를 찾고 있었다. 브런치(글쓰기 플랫폼)에서 내가 쓴 ‘당신을 기다린 도시 군산’ 22편을 모두 읽고, <오마이뉴스>에 쓴 군산 관련 글도 하나하나 찾아 읽었다고 했다. “작가님이 집필 해주신다면 저희 시리즈가 더 빛날 것으로 생각됩니다”라는 마력의 문장을 덧붙였다.
내가 이 도시에 처음 발 딛은 때는 1990년 12월, 학력고사를 보러 왔다. 짐을 푼 곳은 1960년대에 지어진 항도장, 긴장을 풀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간 곳은 1920년대에 세워진 국도극장, 무심코 들어간 빵집은 1945년에 개업한 이성당,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우루루 춤추러 간 곳은 나중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은행 건물이었다.
1899년에 항구의 문을 연 도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로인 전주·군산간 신작로가 뚫렸던 군산. 근대가 남긴 유산은 발산초등학교 뒤뜰에도, 시민들이 날마다 산책하는 월명공원에도 있었다. 나는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에 담아내고 싶었다.
10월 25일, 출판사의 팀장님과 책임편집자님을 군산 한길문고에서 만났다. ‘신의와 성실로써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는 가계약서를 받고 바로 동네 카페로 갔다. 병풍처럼 그 카페를 감싸주는 산이 없고, 개울이 시원하게 카페 앞으로 흐르지 않아도 명당이었다. 노트북 모니터를 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편안했다. 길 건너에는 나무가 무성했다.
11월은 ‘잘해보자’는 마음을 먹기에 알맞은 계절이었다. 맑고 차가워서 나른하지 않았다. 한낮에 잠깐 따스해진 햇볕이 어깨와 등을 감싸면 살아가는 기쁨을 느꼈다. 마침 ‘군산 한 달 살기’를 하러 온 서울 시민 권나윤씨도 곁에 있었다. 둘이서 임피역, 이영춘 가옥, 청암산, 군산공항, 미군기지, 월명공원, 선유도, 옥구저수지, 은파호수공원 등을 돌아다녔다.
놀 때는 결심하지 않고도 바로 뛰어들 수 있지만, 일할 때는 본궤도로 진입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내일 시험 보는데도 난데없이 필통과 가방을 정리하고, 책꽂이의 각을 맞추던 학생시절처럼 나는 글 쓰는 일에 빠지지 못 했다. 한 달 동안 쓴 글은 은파호수공원과 키티의상실. 글을 읽은 책임편집자님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작가님,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인문지리서입니다. 여행서가 아닙니다. 작가님이 전달하려는 분위기와 느낌들은 잘 전달되지만, 문단 사이의 연결에서 역사적인 설명이나 취재한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해 주세요. 그래야 독자들이 작가님의 의도를 매끄럽게 따라가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키티의상실'처럼 스토리가 있는 가게 이야기는 좋습니다.”
에세이, 인터뷰 글, 여행기, 동화 등을 써온 게 헛된 일은 아니었다. 인문지리서는 처음이었지만 편집자님이 하는 말을 재깍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썼던 글하고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다시 충실하게 목차를 들여다보고, 취재를 하고, 군산에 관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혼자서 답사를 다녔다. 그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한 달에 세 편씩밖에 쓰지 못했다. 중간원고는 3월 31일, 최종원고는 7월 31일까지 보내야 하는데, 초조했다. 수십 번씩 가본 곳이라고 해도 조금씩 변해가니까 다시 확인하러 가야 했다. 나포 십자뜰의 가창오리 군무는 오로지 겨울에만 볼 수 있으니까 당장 가야 했다. 뭉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기댈 데 없는 넓은 들판이 나포 십자뜰이다. 사진가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찍겠다는 목표가 있으니 모르는 사이여도 서로 동지다. 무작정 새를 보러 가는 나 같은 사람은 옷을 따뜻하게 입고 가도 어쩐지 춥고 쓸쓸하다. 그래서 초등학생인 둘째아이와 같이 갔지만 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어떤 사람이 혼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군산에 살면 좋으시겠어요. 힘들 때마다 이렇게 새 보러 오고 얼마나 좋습니까?”
사진가들은 ‘우리나라 풍경 사진의 끝판왕’이라는 가창오리 군무를 찍기 위해 강원도나 경상도에서도 군산까지 왔다. 영국 BBC에서는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 자연의 경이로운 순간’이라고 십자뜰을 격찬했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들에게 십자뜰은 먼 곳을 오래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입은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곳이었다.
드디어 글쓰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원고마감보다 앞당겨서 쓸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오전에는 한길문고에서, 오후에는 동네 카페에서 일을 했다. 눈 온 다음 날에 언덕에서 비료 포대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속도감 있게 글을 쓰던 나는 며칠 만에 고꾸라졌다. ‘자판 소리가 커요!’ 화장실에 갔다 와 보면 내 노트북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1층은 그냥 카페, 2층은 스터디카페의 분위기를 추구하는 곳. 학생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는 비켜줘야 했다. 마음이 작아진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가방을 싸서 나왔다. 새로 물색한 곳은 ‘삼선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많은 진짜 스터디카페였다. 나도 학생들 흉내를 내고 싶어서 지난봄에 선물 받고 몇 번 안 신은 ‘삼선 운동화’를 꺼내 신고 갔다.
‘삼선 파워’는 존재했다. 정해놓은 원고분량을 날마다 제 시간 안에 끝냈다.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때는 2월 말, 질 게 빤하지만 추위는 땅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봄기운에 맞서고 있었다. 코끝과 발끝은 여전히 아렸지만, 아파트 단지 건너 상가의 골목길에는 매화꽃이 피었다.
취재와 인터뷰를 충분히 한 것 같아도 글을 쓰다가 빠진 이야기의 퍼즐 조각을 만나면 난감했다. 그 장소에 가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고대소설처럼 반드시 귀인들이 나타났다. ‘오산상회’를 쓸 때는 서래포구에서 자랐던 한의사가 때죽나무 열매즙으로 기절시킨 물고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포구 앞에 화력발전소가 지어지면서 사라진 뱅어도 기억하고 있었다.
벚꽃이 피고 져도 학교는 문을 열지 못 했다. 코로나19는 사람들의 일상을 너무 쉽게 무너뜨렸다. 나도 카페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글을 썼다. 가끔은 둘째랑 부루마블 게임을 했다. 하와이에 호텔을 짓고도 내 수중에 돈이 남아돌았다. 건물을 소유하고 보니 내가 바라는 게 똑바로 보였다. 아이가 등교하는 것과 날마다 쓸 수 있는 필력이었다.
3월에는 원고의 70%를 출판사에 보냈다. 4월에는 원고의 90%를 썼다. 거의 다 온 것 같아서 그럴싸한 계획을 짰다. 드라마 <스토브 리그>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풍경 좋은 카페에 가서 로맨스 소설을 읽을 작정이었다. 들떴던 마음은 책임편집자님이 보낸 메일 한 통으로 싹 정리되었다.
“작가님께서 빠르게, 그리고 흥미롭게 써주시는 덕분에 <군산>편을 예정보다 조금 일찍 출간하면 어떨까 합니다. 저희 팀에서 28개 원고를 보는 동안 작가님께서 '군산의 짧은 역사'와 '저자 서문'을 쓰시면 어떨까요? 일정을 조금 당겨서 5월 중으로 원고 마감이 가능하실지 여쭤봅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
느긋한 게 내 특기다. 학교 다닐 때는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지각을 해서 혼났고, 아이들 유치원 보낼 때는 통학 버스에 못 태우고 차로 데려다 주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검은 기운을 내뿜는 ‘원고 마감’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맞서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안 들었다.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아니니까 빨리 끝내자는 마음뿐이었다.
5월 14일, 출판사에 나머지 원고를 보냈다. 글을 검토한 편집부에서 콕 집어준 구멍을 메우는 데 또 보름이 걸렸다. 6월 한 달 동안 2교와 3교 교정지가 오고갔다. 책임편집자님은 7월 1일에 최종 파일을 보내줬다. 내용 수정은 어렵고, 오타를 비롯한 틀린 부분이 있는지만 봐주라고 했다. 그게 끝이었다. 정말로 끝난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님, 드디어 실물 책이 나왔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항상 일정 맞춰 작업해주신 덕분에 저희도 좀 더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책이 나왔으니 이제 시작이고요! 잘 팔아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증정본에는 책임편집자님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새해가 올 때처럼 시간에 줄을 긋고 편집자와 작가가 똑같이 카운트다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팔짝 뛰어서 편집자들이 있는 쪽으로 건너가 출발선에 같이 섰다. 책은 쓴 사람도 열심히 팔아야 하는 상품이니까.
탕! 한길문고에 책이 입고됐다는 신호탄이 울리기도 전에 진주강씨 종친회에서는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을 단체로 주문했다. 전지전능하신 아내의 조언으로 <찌라시 한국사>를 쓴 김재완 작가님은 서울에서 일부러 한길문고에 사인본을 주문했다. 수송동의 옛이야기를 들려준 치과의사 박종대씨는 “대박 나서 맛있는 거 사라”는 불가능한 꿈을 이야기했다.
책을 펴낸 작가들은 한동안 서점 한 귀퉁이에 서서 염탐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책 중에서 자기 책을 사가는 독자를 목격하면,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설이 있어서다. 나는 거의 날마다 내 책을 사가는 독자들을 만나서 사인을 하지만 베셀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2쇄를 빨리 찍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하다.
** 편집자들과 함께 그렇게 들여다봤는데도 오탈자가 있습니다. 재쇄를 찍어서 고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