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주님이 갑자기 반차를 냈다면서 오후 2시 이전에 집으로 데리러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계원 나부랭이가 계주님 말씀에 반박을 할 수 있나. 또 다른 계원 배지현 자매를 태우고 계주님네 아파트로 갔다.
날씨는 우리 계원이 아니다. 계주님의 심기를 살피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우산을 쓰고 걸어도 신발과 바짓단, 어깨 한쪽이 젖을 만큼 비가 내렸다. 판단력이 뛰어나신 계주님이 월명공원이나 청암산 말고 은파를 걷자고 했다. 계주님의 지도하에 계원들은 1만 2천 보를 걸었다. 그 와중에 나는 불경스럽게도 파전에 막걸리타령을 했다.
하찮은 내 욕망을 단숨에 날려버린 사람은 우리 계주님. 펀드나 주식을 1도 모르는 계원들의 회비를 10년 전부터 투자하고 계신 분. 펀드 수익률이 60% 넘었다고 계원들의 생일날에 100만 원을 통장에 보내주신 적도 있는 분. 하여튼, 위대한 우리 계주님이 가수 아이유씨가 광고한 신발을 사러 가자고 했다. 물론, 펀드 수익난 곗돈으로.
우리는 신상 신발을 한 켤레씩 샀다. 계주님이 재킷도 사라고 했다. 감히 “아니되옵니다!” 라고 할 수 없어서 티셔츠까지 샀다. 지현은 모자도 안 달리고 소매도 없는데, 내 재킷보다 몇 만 원 더 비싼 후리스 조끼와 실용성이 떨어져 보이는 재킷을 샀다.
노을 지는 시간에 딱 맞춰서 비응항 ‘등대로’에 도착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바다 너머로 지는 해를 보는데 행복이 파도처럼 철썩철썩 밀려왔다. 어릴 때 나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소랑 둘이서 일몰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더랬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 광활면인가 진봉면 출신인 계주님은 들판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뜻하지 않게 끝내주는 하루를 보내고 왔다. 근심 하나가 생겼지만, 계주님이 사주신 신발을 신고 걸으면서 생각하다 보면 어찌어찌 헤쳐나갈 거고, 그러면 또 계주님이 반차를 냈다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근사한 카페에 가자고 하겠지. 딱 이때 입을 재킷도 사고, 여름에 입고 걸을 셔츠도 샀으니 패션 고민은 끝! 이게 다 계주님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