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떡 그라탱

by 배지영

오늘 집에 있었다. 강썬님이 하교할 때는 “어서 와! 고생했어!” 힘껏 말하고 안아줬다. 강성*씨 퇴근할 때도 똑같이 해줄려고 마음먹었는데. 자기가 무슨 우사인 볼트야? 어느새 부엌에 가 있었다. 오후 6시에 나가봐야 해서 시간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명색이 ‘남편의 레시피’ 기록자.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성*, 저녁 메뉴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저리 가 있어.”


뭐든 아무것도 아니라는 아저씨 화법에 맞서는 것 자체가 패배의 길. 나는 그냥 내 방(없음. 안방 벽에 책상 붙여놓고 일함)으로 왔다. 방문을 안 닫으니까 덩치 큰 강성*씨가 가스레인지와 개수대와 오븐 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게 보였다. 곧이어 달큼한 양파전 냄새가 밀려왔다. 전을 뒤집은 강성*씨는 냉장고에서 꺼낸 삼겹살인가 목살인가를 구웠다.


구운 고기에 쌈을 싸먹는 건 세 사람 이상 모여서 먹어야 하는 음식 아닌가? 밥 먹을 사람은 나하고 강썬님 둘 뿐인데. 그러니까 메뉴가 마땅찮다는 말이다. 척하면 척, 내 마음을 읽을 리 없는 강성*씨는 큰 소리로 요구했다. 두꺼운 점퍼 안에 입을 얇은 옷 하나만 꺼내 놓으라고. 시계를 보니 5시 52분. 내 심기를 어필할 시간이 없어서 옷을 골라놓았다.


“어. 벌써 왔어?”

강성*씨는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6시에 우리 집 주차장으로 오기로 한 사람이 도착했다고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뭐하긴 뭐해? 밥하고 있지. 쫌만 기다려.”


헐!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났다. 강성*씨는 저녁 약속이 많다. 대개 술을 마시니까 차를 놓고 간다. 그때 누군가는 우리 집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약속 장소로 같이 간다. 후배이거나 친구이거나 선배님인 그들은 도착하면 꼭 전화를 했다. 강성*씨는 거의 항상 똑같이 말했다. 지금 밥 차리고 있다면서 금방 내려간다고.


그 사람들은 한 번도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일도 많고 약속도 많은 강성*씨는 왜 집에서 밥만 하고 있을까? 늦둥이 아들은 초등학생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아내라는 사람은 왜 자기 손으로 밥을 안 차리는 걸까?


‘도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 빠져들기 전에 강성옥씨는 오븐에서 음식을 꺼냈다. 친절하게도 이름까지 알려줬다.


“그라탱이야. 맛없을지도 몰라.”

“맛있게 생겼는데?”

“원래 고기 넣는 건데 가래떡 넣었다.”

“꺄아! 나 너무 좋아하는 거잖아.”


하마터면 일도 못 하고, 책상도 드럽게 쓰고, 잘하는 게 없다고 자기 혐오에 빠질 뻔했는데 그라탱이 구원했다. 러시아 격투기 삼보를 두 달째 수련 중인 강썬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양파전, 삼겹살, 쌈이랑 놓고 전체 샷을 찍어야 하는데 그라탱의 절반을 먹어버렸다. 차라리 싹 먹고 완전범죄로 갈까? 그런데 강썬님도 그라탱 좋아하는데...



강썬아. 어린이들은 스무 살 되기 전에 많이 이런다.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그때를 대비해서 엄마는 꼭 하는 게 있어. 네가 샤워하고 나면 드라이어로 몸 말려서 옷 입혀주는 것. 짱구네 집처럼 너 좋아하는 보리차 끓여주는 것. 그리고 그라탱 절반 남겨주는 것.



#그라탱

#남편의레시피

#엄마가나한테해준게뭐있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우 갈릭 버터구이